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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대구광역일보 기자 / 입력 : 2014년 02월 21일(금) 14:43

↑↑ (사)대구불교총연합회는 27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희망의 달구벌 관등탑 점등식’을 가졌다.
ⓒ 대구광역일보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배경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차관공여(借款供與)를 제기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의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펴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整地作業)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했다.

제1차 차관은 1905년 1월 ‘폐정리자금채’라는 명목으로 해관세(海關稅)를 담보로 한 3백만 원이었다. 제2차 차관은 1905년 6월 우리 정부의 부채 정리와 재정 융통에 필요한 자금 명목으로 한국의 국고금을 담보로 2백만 원을 들여왔다.

제3차 차관은 1905년 12월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을 일본 자금에 예속시킬 목적으로 금융자금채 150만원을 들여왔다. 제4차 차관은 1906년 3월 기업자금채의 명목으로 5백만 원을 들여왔다.

이러한 일본측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서상돈 애국지사
ⓒ 대구광역일보
▣국채보상운동 경과

1907년 2월 중순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을 통해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했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돼,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또,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 : 대구 광문사)는 민회소(民會所),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에서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 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했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또, 수전소(收錢所)는 서점ㆍ약국ㆍ대한매일신보사ㆍ잡지사 등으로 지정했다.

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들 단체의 운동은 국채 보상을 위한 계몽적 활동과 직접 모금 운동을 하는 실천적 활동으로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눌 수 있다.

운동에는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이에 따라 고급 관료들도 한때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상인들은 일본 차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천ㆍ부산ㆍ원산ㆍ평양 등지에서 상업회의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했다.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ㆍ학회ㆍ학교ㆍ언론기관 등을 중심으로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운동에는 신지식인뿐만 아니라 유림(儒林)과 전ㆍ현직 하급관리들도 각 지방에서 상민층과 함께 적극 참여했다.

또, 이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많은 부녀 층이 참여하여 각종 패물을 의연소(義捐所)에 보내 온 점이다. 그리고 노동자ㆍ인력거꾼ㆍ기생ㆍ백정 등 하층민들까지도 적극 참여하여 이 운동은 그야말로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회의 모습
ⓒ 대구광역일보
▣국채보상운동 전개 결과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해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했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國債報償金消費事件)’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여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했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순수한 애국 충정에서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전국적인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일제의 방해ㆍ탄압 책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끝내 좌절되었던 것이다. 운동이 비록 좌절로 끝나긴 했으나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하나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다.

▣참고문헌

「한말국채보상운동(韓末國債報償運動)에 관(關)한 일연구(一硏究)」(이송희), 『이대사원(梨大史苑))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과 프레스 캠페인」(최준), 『백산학보(白山學報))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황성신문(皇城新聞)』

 ▣국채보상운동 발기 연설문

다음은 국채보상운동 발기 연설문의 일부이다.

금일(今日) 문제(問題) 국채(國債)의 보상(報償)이로 본사(本社)에셔 발기(發起)니 본사(本社)의 형편(形便)브터 강 설명(說明)하고 본사(本社)를 광문사(廣文社)라 명칭(名稱)야 설립(設立)든 초두사기(初頭事機)를 방청제위(傍聽諸位)가 다 목도이문(目睹耳聞) 한바

... (중략) ...

제일패망(第一敗亡)할와 제일시급(第一時急) 바 일천삼백만원(一千三百萬圓)의 국채(國債)올시다.

... (중략) ...

발기자 본사장(本社長) 김광제(金光濟), 부사장(副社長) 서상돈(書相敦)으로 자서(自書)하오리다 본인(本人)드터 흡연(吸煙)의 제구(諸具)를 만장제군전(滿場諸君前)에 파쇄(破碎)오며 오등(吾等)의 토지(土地)와 신체(身體)가 전집중(典執中)에 현재(現在)한지라 보상(報償)면 속토속신(贖土贖身)할것이오 미보(未報)면서 여(予)하고도 무죄(無罪)한이 몸이 인(人)의 노예(奴隷)되리로다 황천(皇天)이 감응(感應)여 전국인민(全國人民)으로 일심합력(一心合力)야 대사(大事)를 순성(順成)고 민국(民國)을 보존(保存)케 옵소셔 (합장재배 (合掌再拜) 휘한허희(揮汗噓晞)고 하담이퇴와(下坍而頹臥)니라) 『강연집(講演集)(동양선생김광제강연(東洋先生金光濟講演))』(광동서관(光東書館), 1909)

↑↑ 국채보상운동이미지
ⓒ 대구광역일보

▣1907년 1월 29일 광문사 특별회를 마치고
 감광제지사가 작성 낭독한 글

국채보상운동 취지서[편집]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천 3백만원은 우리나라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가 못 갚는다면 그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인민들은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원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 십원, 백원, 천원을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자)

대구광역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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