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구조에서 대한민국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할 수 없는 것도 없는’ 기묘한 아노미 상태에 빠져든다. 법치는 형식적으로 유효하지만, 실제로는 무력화한다. 헌법 위에 떼법과 촌법이 있다는 유행어가 그런 현실을 보여준다. 87체제는 이런 구조적 문제로 인해 내구성이 계속 약화돼왔다. 그리고, 87체제 이후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계속 커졌다.안철수로 대표되는 제3지대의 등장도 87체제 약화에 따른 현상이었다. 좌우 동거와 권력 분점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정치적 요구가 커졌고,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제3지대와 중도세력의 근거가 마련됐던 것이다. 안철수가 잇따른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이 급전직하하지 않고, 완만한 우하향 곡선을 그려온 것도 87체제의 특성에서 연유한 현상이다.87체제는 직선제 개헌을 내세운 좌파의 정치적 승리를 우파가 6.29선언이라는 정치공학으로 저지해낸 결과물이었다. 우파는 노태우 정권을 통해 제도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승리자인 좌파에게 명분을 빼앗겼다. 좌파는 그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무기로 제도 권력을 계속 확대해왔다. 3당 합당과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집권이 그런 좌파의 영향력 없이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들이다. 우파 정당 내에서 좌파 성향을 공유하는 정치인들이 ‘개혁파’로 분류되는 것도 마찬가지다.즉, 87체제는 권력 분점과 공유를 전제로 좌우의 동거와 균형을 핵심으로 하는 체제이지만 내부적으로 그 균형이 계속 무너지는 과정을 밟아왔던 것이다. 좌파의 정치적 정당성이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관철되는 과정을 통해 권력의 추는 좌파쪽으로 계속 기울어졌다. 그 최종 귀결이자 완성이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의 집권이었다.문재인의 집권은 87체제의 완성이자 종결이다. 87체제의 속성인 좌우 동거와 권력의 분점,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이제 불가능하다. 좌파가 모든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국정 파탄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지지율이 유지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대중들에게 문재인 정권은 이제 대한민국 그 자체로 인식된다. 레짐체인지가 완성된 것이다.87체제는 헌정적으로는 아직 유효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시효가 종결됐다. 최근의 개헌 논의는 87체제의 정치적 종언이라는 정치권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결과이다.거버넌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87체제에서 최소한의 거버넌스 기능을 했던 것이 법률가 집단이었다. 당근을 주기보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으로 통치 시스템을 유지했던 군부 세력의 퇴장 이후 정권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강제력은 법률적 장치를 통해서만 작동했기 때문이다. 변호사 출신들의 국회 진출이 늘어나고 대통령도 두 사람이나 배출한 것도 그런 현상의 연장이었다.특히 검찰은 87체제 거버넌스의 핵심이었다. 6공화국의 모든 대통령은 검찰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사실상 통치가 불가능했다. 87체제 들어 끊임없이 검찰개혁이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했던 것도 검찰의 이런 기능과 비중을 역설적으로 반증해준다.포스트 87체제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어떤 것일까? 일단 거버넌스 기능의 회복에 방점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경기지사나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정치적 기대 역시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87체제의 한계를 극복해달라’는 요구의 일환이다. 강력한 리더십을 연상시키는 두 사람의 이미지도 그런 요구의 결과이다.다만, 윤석열 전 총장은 87체제의 현상유지 요구를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검찰이 87체제 유지에서 핵심 기능을 했다는 점, 윤석열 총장이 그 검찰 경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두각을 나타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보여준다.현재 국민의힘 등 야권의 정치적 영향력은 문재인 정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효과일뿐, 자신들의 고유한 메시지나 콘텐츠 등 정치적 가치에 힘입은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내년 대선에서 야권의 정권 탈환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이는 냉정하게 현실을 구조적 관점에서 판단한 결과이다. 87체제의 본질과 그 미래를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완전히 새로 출발하는 각오 없이는 우파도, 대한민국의 운명도 암울하다는 전망을 내릴 수밖에 없다.<출처 : 펜앤드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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