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사람들로 북적이고 볼거리, 먹을거리, 흥미로운 거리문화가 사람들을 유혹하고 흥분하게 만드는 곳. 연일 청춘들의 맑은 얼굴로 싱그러운 꽃을 피우고 해가지면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을 뿜어 광란의 거리로 변신하는 곳. 바로 동성로다. 동성로는 대구역 네거리에서 중앙파출소까지 800여 미터에 이르는 구간이다. 대구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타지역 사람들, 외국인 관광객까지 대구에 왔다면 꼭 들러야하는 대구의 명소다. 1. 동성로의 유래, 100년전 대구 동성로는... 대구의 심장이라 불리는 동성로는 대구의 오랜 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다. 대구시민들이‘번화가’라고 말하는 대구의 중심지 동성로. 그렇다면 ‘동성로‘라는 지명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동성로는 과거 조선시대에 대구읍성의 성곽이 있었고 읍성의 중심지었다. 대구읍성은 1601년 경상감영이 설치된 뒤, 1736년 영조12년에 관찰사 민응수의 건의로 세워졌다. 읍성은 둘레 2천 650미터, 높이 5.6미터, 두께 8.7미터 규모로 남문인 영남문, 북문인 공북문, 동문인 진동문, 서서문인 달서문을 갖추고 있어 명실공히 대구의 담장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상권 확보를 위해 친일 관료가 고종의 허락도 없이 성곽을 허물면서 그 자리에 길을 놓았고 4성로인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생겨났다. 그중 동쪽에 해당하는 길이 1914년 ’동성정’에서 1946년 지금의 ‘동성로’가 된다. 2. 일제강점기... 4대문이 사라지고 4성로가 생겨나면서 이는 일본의 대구지역과 주위 도시에 대한 수탈을 가속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4성로 중심인 십자대로 주변으로 일본인들만이 누리는 초호화 상권과 통치기구들이 설치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읍성의 골목이 사라지고 신작로가 뚫리면서 그 중 동성로는 100년의 대구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된다. 1914년에 들어서며 일제는 수탈을 가속화하기 위한 계략으로 도시의 규모를 축소시켰고 그러면서 동성로에 도청을 두어 실제적인 도시화를 만들어 놓는다. 3. 1950년 6.25전쟁 당시, 이후 60년대 동성로에 불어온 바람... 한편, 1950년 6.25전쟁은 동성로의 역사를 다시 쓰게하는 계기가 된다. 전쟁 발발 45일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면서 각종 군본부와 정부기관이 대구에 설치됐고 각지의 피란민들이 모여 시장을 새로이 개척했는데, 동성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대구역이 인접해 있는 교동이 먼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주변으로 다방과 빵집, 음식점 등이 생기면서 1960년대까지 성업했다. 동성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활기를 띄기 시작한 건 대구백화점의 등장이었다. 1969년 동성로에 대구백화점이 입성하면서 유동인구가 급속하게 늘었다.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동성로 일대에는 여러 상가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이는 동성로가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 첫 신호탄이 된다. 또 하나 동성로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소가 있다. 지금은 한일cgv로 변한 한일극장이다. 1949~1953년 문화극장, 1953~1957년 중앙국립극장을 거쳐 1957년부터 한일극장이 된다. 그 명성을 이어가며 1980년대 후반까지 대구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자리잡았고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일멀티플렉스에서 지금은 한일cgv로 변했다. 60년 세월의 옛 명성은 퇴색됐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지키고 있다.4. 7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의 동성로 1970년대 동성로는 젊음과 낭만이 넘쳐나고 유행을 선도하는 거리었다. 1980년대는 민주화 시위와 6.10항쟁 등 대구 시민들의 삶과 땀이 배어있는 역사적 거리라고도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 패션,의류,액세서리 골목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지만, 1990년대 초 부도심 개발붐과 함께 상권이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또 1997년 IMF 구제금융에 이어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숱한 악재까지 겹치면서 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3년 대구시민을 충격에 빠뜨리며 주저앉게 한 사고가 일어난다. 대구지하철 방화참사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할 아픔으로 기억된다. 5. 2007년부터 동성로의 변화 한편, 2007년부터 동성로에 공공디자인 개선사업이 진행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한전배전반을 지하에 묻고 도로블록을 포장해 상설 야외무대와 이벤트 광장을 조성했고, 동성로 노점상 철거와 간판교체사업, 벤치와 바닥분수 등도 설치해 보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거리로 활기를 되찾았다. 또 동성로가 100여 년 전 대구 읍성 동쪽을 허물고 만든 도로라는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읍성이 있었던 자리에 장대석을 이어 깔면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곳으로 거듭났다. 6. 동성로 축제를 말하다. 동성로하면 동성로 축제를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부터 시작돼 지난 24년간 지역문화, 지역산업과 함께 호흡하며 매년 개최하고 있다. 동성로 축제 기간 동안 1일 유동인구 50만 명이 넘는 많은 시민들이 동성로를 찾는다. 단연 대구의 대표축제다. 이찬우 동성로상가번영회 국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동성로가 더욱 매력적인 축제의 거리로 발전하고 있다며 동성로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동성로 축제가 좋은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7. 동성로 요즘 상권의 변화 동성로는 변화가 오기 전 변화를 시도한다. 상점들이 생겼다가 금새 사라지기도 하고, 골목들은 빠른 속도로 팽창하기도 한다. 또 갖가지 특화된 골목은 동성로를 더욱 매력적인 거리로 만들기도 한다. 한편, 동성로를 대표하던 골목들의 명암도 엇갈리고 있다. 통신 골목, 야시 골목, 늑대 골목, 로데오 골목 등 그동안 동성로의 터줏대감 역할을 했던 골목들은 반 이상 없어지며 침체한 반면, 카페 골목, 네일 골목, 클럽 골목 등이 떠오르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커피 전문점 수가 500개를 훌쩍 넘어서며 커피골목이 강세를 이루고 있다. 8. 동성로의 터주대감... 한편, 쉼없이 달려오는 동성로의 변화와 창조 속에서도 40여년 동성로를 지켜온 상점이 있다. 동성로 터줏대감 분식점이라 불리는 태산만두와 미진분식이다. 태산만두는 1972년 대구백화점 앞에서 운영하기 시작해 2011년 중앙파출소 옆으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다. 이전 후 그 유명세를 잃어버리는 여느 맛집과는 달리 이곳은 언제나 문전성시다. 태산만두 왕개순 대표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50,60대 단골손님들이 많다며 오랜시간 잊지않고 찾아주는 손님들에 감사한 마음뿐이라고 전했다. 한편, 빠르게 변화하는 동성로에 옛 상가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며 다소 안타까워했다. 그런가하면 대구에서 이곳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유명한 김밥 맛집이 있다. 미진분식이다. 대구백화점에서 중앙파출소로 걷다보면 소박하게 자리한 미진분식을 만날 수 있다. 미진분식 이진곤(73)대표는‘영업을 처음 시작한 1975년에는 손님이 많이 없어 힘들었지만, 김밥하나로 동성로와 함께 꾸준히 성장해왔다며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앞으로도 동성로가 아름답게 변화해주길 바란다며 동성로가 존재하는 한 분식집을 계속해 나갈 생각이라고 전했다. 젊은이들에겐 쇼핑과 만남, 트랜드의 중심지이자, 장년과 노년층들에겐 젊은시절 추억의 놀이터이며 쉼터로 기억되는 동성로. 문득 이 길을 걷다보면 보고싶은 옛 얼굴을 만날 것 같은 아련한 가슴. 우후죽순 새로운 상점과 건물들이 들어서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오랜 시간 대구시민들의 곁에서 삶과 애환을 함께한 친구임에 분명하다. 주말이면 대구시민 10명 가운데 1명은 동성로를 찾을 만큼 동성로에 대한 대구시민들의 마음은 각별하다. 대구의 문화와 상업, 만남과 축제의 중심지로 오랜 시간 명성을 이어온 동성로가 2014년 청마의 해,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 진취적이고 역동적으로 달리는 청마처럼, 동성로는 오늘도 힘찬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