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라고 한다면 뭘 우리 문화라고 할까? 보통은 우리 문화라고 하면 나라 이름을 붙여 한국 문화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 전통문화를 생각하기도 하고 세계문화의 용수로가 된 우리 현대문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칼럼니스트가 불교수행에 깊은 관심을 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역시 전자가 맞을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 생각과 별개이지만 둘 다 아니다. 시대적으로는 둘 다 합친,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아울러 우리 문화라고 지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나 ‘한반도’라는 장소의 개념을 뛰어넘어 ‘전통’과 ‘현대’라는 시간적인 개념만 포괄할 수 있는 좁은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공간을 초월한 공동체적인 개념으로서 ‘우리’ 즉 ‘나와 너’를 포함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서 정작 ‘우리’라는 개념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우리라고 생각되는, 그 누구도 그 개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그런 무장해제 된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사전적인 의미는 ‘말하는 이가 자기와 듣는 이, 또는 자기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다. 우리가 말하는 2인칭인 너와 1인칭인 내가 우리이며 이게 단수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는 복수인데도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이라는 점이다. 너(2)와 내(1)가 합쳐서 우리가 됐는데도 1인칭이라는 것이다. 하나 더하기 둘이 셋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좌우 진영논리로 거의 파산 직전에 내몰린 대한민국에서 호남 무시나 차별로 대표되는 지역주의나 동서분열은 저만치 사라져버린, 한물간 ‘왕따 작전’이 돼버렸다. 우리는 지역주의의 극복을 이상하게 하는 나라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좌우 한쪽으로 갈려 좌익이나 우익이 됐음에도 이 나라가 쪼개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너와 내가 합쳐줘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도 여전한 게 우리라고 한다면 우리란 참으로 묘하면서도 대단하다. 시공간과 공동체를 뛰어넘은 우리에게는 요즘 다문화라는 개념이 낯설지 않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이주 배경을 가진 그들 대부분은 노동과 결혼이라는 경험을 우리나라에서 한다. 특히 결혼해서 2세를 낳은 그들에게 우리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 아니 그 전에 그들은 우리가 맞는가도 신중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NGO 나마스떼코리아의 네팔문화학교와 아시아문화학교를 기획 및 운영하고 강사로 참여한 칼럼니스트는 다문화가 ‘따문화’가 돼버린 우리 교육현장에 아연실색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주배경을 가진 우리 국적을 가진 사람인 그들과 그들의 자녀는 이미 제도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정부인 여성가족부(여가부)는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또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발간한 ‘불기2558(2014)년 한국의 사회·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문화 수용과 관련해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를 친구나 동네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응답자 비율이 각각 70.0%, 72.6%로 나타났으나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응답도 각각 12.5%, 8.7%였다. 국민 3분의 2 이상이 이미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를 우리로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2011년 조사 결과와 비교할 때 외국인 노동자를 가까이하기 싫다고 답한 응답자가 7.9% 늘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증가한 것이 아쉽다. 이에 비해 결혼 이민자에 대해서는 가까이하기 싫다는 응답자의 비율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각각 5.5% 증가해 이에 대한 양극화가 분명히 이뤄지고 있다.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와 폐쇄적인 보수라는 두 상충하는 좌우 진영논리가 국민 의식 속에 파고들어간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에 대한 수용 태도가 2년만에 크게 달라지긴 했지만 70%가 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은 미미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치도 아니다. 이미 외국이라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이들이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화에 편입돼 있다. 굳이 국적으로 나눌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부모 한쪽이 이주 배경을 가지지 않은 한국인이라면 그런 다문화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시조는 무엇이고 우리는 또 어떤 정의를 가질 수 있을까? 그들에게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단군을 공통된 시조로 가르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혈연적으로는 아닐 수 있지만, 뜻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라는 DNA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과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려 교화시킨다는 재세이화는 다른 말이 아니다. 결국, ‘이타(利他)’ 즉 남들을 이롭게 하며 이기(利己), ‘나를 위해 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나 아닌 사람을 남이라고 하고 아예 모르는 사람은 남이라고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너도 남이다. 나와 네가 합쳐 우리가 됐으니, 다문화가정도 이미 우리가 맞고 내가 이롭게 해줘야 할 남이면서도 우리다. 이처럼 우리의 단군신화는 수천 년이 지난 세계화의 시대이며 폐기해야 할 좌우 진영논리의 시대인 지금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야 할 우리나라 사람의 기본 이념이 된다. 요즘 ‘우리나라란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향해 가야 하는가? 한국인의 자격을 넘어선 품격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만약 고민했다면 여러 가지 답 가운데 ‘홍익인간 재세이화’라는 말을 이미 포함했을 것이다. 단군의 실존이나 생물학적인 민족이나 인종개념은 차치하고서라도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뜻 즉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다’는 그 뜻만은 우리가 모두 수용해야 한다. 이미 우리의 DNA가 돼버린 그 뜻은 놀랍게도 자비와 연민을 중시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상충하지 않는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이념으로서도 충분한 ‘홍익인간 재세이화’ 즉 ‘이타’라는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 이것이 한민족 또는 대한민국, 아니 우리의 자격이라고 하면 너무 의도가 강조된 잘못된 개념일까?  이것이 또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다만, 세계인들이 한민족이나 대한민국의 품격을 얘기할 때 그들(그들에게는 우리)은 홍익인간 재세이화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간절히 소망한다.  하도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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