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 갑오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갑오년이 ‘청마(靑馬)’를 의미한다고 해서 젊은 말의 역동적인 한 해로 기대에 부풀었지만 재난이 중첩되면서 아픔으로 얼룩졌고 사회적으로도 각계각층에서 충격적 사건이 잇달아 실망과 분노로 점철된 한 해였다. 너무 섬뜩한 사건이 잇달아 남은 며칠이라도 제발 탈 없이 조용조용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참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거미줄처럼 얽힌 한 해였다. 다사다난 정도가 아니라 삼각파도에 갇혀 숨 한 번 제대로 못 쉰 지옥의 한해였다. 무엇보다 졸지에 300여 명의 목숨이 사라진 4월 16월의 ‘세월호 참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은 몇 달 동안 세월호로 인해 번민하고 우울했다. 침묵하고 조심했다. 그리고 건국이래 초유의 대형사건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정부에게 절망했다. 아직도 아홉 사람은 실종 상태이다. 더구나 기막힌 일은 단 한 사람도 침몰한 세월호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제까지 대형 사고를 숱하게 겪었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연각화재 대구지하철화재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배가 기울어져 침몰하기 까지 텔레비젼으로 생중계하는 등 상당한 시간이 흘렀으나 어느 누구도 배 안으로 들어가서 구조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정부도 명령하지 않았다. 헌법34조⑥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엄숙한 명령을 정부는 이행하지 않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역사는 달라져야 한다, 달라질 것이다’라고 다짐했지만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참담한 현실이다. 혹독한 추위 속에 떨며 돌아 올 기약 없는 자녀를 기다리고 있는 팽목항의 아홉 가족들도 점차 국민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세월호의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온 군 구타사망사고와 군 성추행사건, 고위공직자들의 추잡한 성 문제, 정윤회와 박지만의 보이지 않는 파워게임으로 TV체널마다 얼마나 시끄러웠던가. 찌라시에 불과하다는 청와대의 ‘십상시’소동은 장마철 천장의 빗물 자국처럼 상처를 남겼다.
서울시향 박현정 대표의 상습적인 욕지거리와 성희롱,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의 ‘땅콩 회향’사건이 전국을 휘젓더니 세밑에 와서 방점이라도 찍듯이 고리원전과 월성원전을 놓고 협박하는 초특급 안보사태까지 불거졌다.
며칠 있으면 지위와 재력 노소에 관계없이 모두 한 살 더 먹게 된다. 세월과 강물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 송나라 대표적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잡시’에 나오는 마무리 구절로 시간을 소중하게 아껴 쓰라는 것이다. “젊은 시절은 거듭 오지 않으며(盛年不重來]), 하루에 아침을 두 번 맞지 못한다(一日難再晨),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及時當勉勵),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歲月不待人)” 세월은 가고 나면 돌아오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니 매사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겠다. 더구나 국사에 있어서라. 박근혜 정부의 천금같은 2년이 흘러갔다. 남은 3년은 확연히 달라야 한다.
새해에는 올해처럼 살지 않기를 소망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 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살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며칠이 중요하다. 이제 매듭 하나를 묶을 때가 됐다. 아픔도 슬픔도 통한도 증오도 매듭지어야 할 마지막 달, 매듭달이다. 낙엽이 회한과 아픔과 설움을 안고 서로 곰삭히며 검게 타들어가 옥토의 자양분으로 거듭 나듯이 희망의 싹을 틔울 엄숙한 시간이다. 잘못을 고백하고 너그러이 포용하고 두 팔로 껴안아 화해하는 것도 매듭달에 할 일이다.
을미년에는 더 이상의 눈물도 없고 아픈 가슴을 안고 밤을 지새울 일도 없으며 그 누구를 원망하는 일도 없기를, 이웃의 아픔도 외면케 했던 지독한 집착도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살고 싶다.
차욱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