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 이부영 상임고문이 11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이 상임고문은 이날 탈당계를 제출한 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인 이부영이 그 멍에를 내려놓고 떠난다"며 "좀 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으련만 능력과 식견이 모자라 여기서 그쳐야 하겠다"고 밝혔다.그는 "저의 정치인생에 여러모로 도움주시고 이끌어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고마운 뜻을 전한다"며 "저의 어리석음과 부족함 때문에 피해를 입었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용서를 빈다"고 밝혔다.그는 "2·8 전당대회를 성공리에 끝내고 단결과 도약을 위해 새롭게 전진하는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당원 동지 여러분들에게도 행운과 승리가 함께 해주기를 온 정성을 다해 빌겠다"며 "정치를 떠나더라도 이 나라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사회가 되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면서 살겠다"고 덧붙였다.이 상임고문은 이번 19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은퇴를 결심했지만 6·4지방선거와 7·30재보선에 이어 전당대회까지 치러지면서 은퇴시기를 미뤄왔다고 한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 상임고문이 강동갑 지역위원장으로 추천한 진선미 의원과 꼬마민주당을 함께 했던 원혜영 의원이 참석했다.그는 정치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국가보안법 철폐 문제를 꼽았다.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천정배 원내대표와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 김덕룡 원내대표와 회동을 갖고 국보법 5대 독소조항 삭제를 합의했지만 국보법 철폐를 주장하는 당내 강경파 의원들의 반발로 개정조차 불발됐다는 것이다.그는 기자회견 후 기자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통합진보당도 내란음모 혐의 외에는 모두 5대 독소조항이 적용됐던 것"이라며 "그 때 합의한 대로 개정됐다면 박근혜 당시 대표는 당내 반발에 부딪혀 정치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이 상임고문은 한나라당 탈당 계기가 됐던 조문파동도 언급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이 정상회담 직전까지 갔는데 갑자기 김 주석의 사망으로 불발돼 두고두고 아쉬웠다"며 "그래서 조문을 제안해서 반발에 부딪혔고 김대중 대통령의 6·15선언에 찬성했더니 나가라고 내쫓더라"라고 말했다.그는 정계은퇴 후 일본 평화헌법 9조를 2015년 노벨평화상 수상후보로 추천하는 캠페인을 주도하면서 오는 5월 동북아 평화를 주제로 출간할 예정인 저서 집필에 주력할 예정이다.이 상임고문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던 중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해 이듬해 해직됐고 긴급조치와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돼 7년간 복역했다. 이후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재야인사로 활동했다.그는 1990년 3당 합당 이후 꼬마 민주당에 합류해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였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서울 강동갑에 출마해 내리 3선을 지냈다. 1997년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합당하자 이에 동참했고 2002년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를 지원했다.대선 이듬해 7월에는 한나라당 소속 이우재, 김부겸, 안영근, 김영춘 의원과 함께 탈당해 그해 10월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17대 총선에 낙선한 뒤 신기남 의장이 부친의 친일경력 의혹으로 사퇴하자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승계했지만 국가보안법 등 4대 개혁입법을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1942년 서울 ▲서울대 정치학과 ▲동아일보 해직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 대변인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민주당 부총재, 최고위원 ▲14~16대 국회의원 ▲통합민주당 부총재 ▲한나라당 부총재 ▲열린우리당 의장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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