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특별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대일외교 10년 경험이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 사회를 식민지세대-해방둥이세대-586세대-MZ세대로 크게 나눠 분석해 보고자 한다.80년대 초 도쿄에서 술기운을 빌어서 속마음을 터놓던 자리에서 한 일본 친구가 “북한사람들이 떼를 많이 쓰는데, 한국 사람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라고 도발해와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일본이 주변국보다 앞서 개명했다고 하지만, 역사적 만행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일종의 떼쓰기가 아닌가? 재일 한인에 대한 차별 의식도 폐쇄적 아집(我執)에서 나오는 떼쓰기가 아닌가?
▣‘식민지세대’한일 간 현대사에 초점을 맞춰보면, 일본보다는 한국이 떼쓰기를 많이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좋은 예다. 공권력을 동원하여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사건인데도 오랫동안 오리발을 내밀었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한참 후에야 김종필이 일본을 방문하여 납치 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 떼쓰기를 졸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었지만, 일본의 축적된 경험과 기술, 사회적 자산에 비교하면 대한민국은 한낮 신생 개도국에 불과했다. 식민통치가 끝난 후에도 많은 것을 일본을 통해서 배워야 했기에 대일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일본의 경협자금을 마중물 삼아 경제발전을 추진한 과정도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는 요인이었다. 일본의 협력은 오랫동안 필수 불가결하였다. 6.25를 전후하여 한미관계가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되었음에도, 바로 옆 선진국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비용면에서나 훨씬 싸게 먹혔다. 급하면 일본의 법률이나 제도를 베끼곤 했다.막상 현장에서는 일본의 협력을 얻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소위 ‘부메랑’ 효과를 일본 기업들이 걱정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추월할까 봐 기술이전에 인색했다. 중국의 개혁 개방 초기에 한국기업들이 중국에 마구 기술을 퍼준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민간기업의 고충은 정말 힘들었다.정부 간 협상에서도 일본 측은 빈틈을 주지 않았다.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좀처럼 양보하지 않았다. 이미 최첨단 선진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신중상주의(新重商主義)’ 통상정책을 추구했다. 자기 상품은 될수록 많이 내다 팔고, 남의 상품은 될수록 적게 사들였다. 한국산 김이나 생사, 이쑤시개와 같은 저개발국 산품마저도 수입을 극도로 제한하려 했다. 일본의 비관세장벽은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일본만이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서 세계 경제 흐름을 교란한 셈이다.
▣‘해방둥이세대’1980년대 일본경제가 세계제일(Japan as Number One!)이라던 시기에도 한국인들은 일본을 가볍게 얕잡아보곤 하였다. 거의 모든 국가가 일본의 국력을 두려워할 때였으므로 매우 의아해했다. 한국인들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자존심이 작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둥이세대에게 철저하게 반일교육 시킨 결과였다. 빼앗긴 민족정체성과 문화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식민통치로 몸에 밴 일본 색을 빼지 않으면 제삼자가 제2의 일본으로 인식하지, 독자적인 한국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미국도 드디어 관세장벽 인하 요구와 아울러, 간사이(關西)공항 입찰공개, 대형 양판점(量販店) 허가 등 비관세장벽 철폐를 위해 강하게 압력을 가했다. 마치 함포사격과도 같았다. 함포사격으로 깨어지는 철옹성의 틈새를 뚫고 상륙하는 해병대 역할은 한국이 맡았다. 합동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85년 G-5 플라자 합의로 일본 엔화 환율을 대폭 올렸다. 일본의 수출 드라이브는 철퇴를 맞았고 장기 침체가 시작되었다. <계속><출처: 펜앤드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