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후면 광복절이다. 8·15에 담긴 의미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1948년의 건국 두 거대 사건이 오버랩되어 있다. 따라서 이날을 기해 사회 곳곳에서 온갖 반일(反日) 퍼포먼스가 넘쳐날 것이고, 일제 만행을 부르짖는 보도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포퓰리즘에 푹푹 절은 정치인들은 반일 감정을 자극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언론을 도배질할 것이다.반일 종족주의의 선봉에 서 있는 동국대의 황태연 교수 같은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3년 12월 1일 대한민국의 독립을 만천하에 천명한 최초의 국제문서 ‘카이로선언’을 쟁취함으로써 마침내 갑진년(1904) 2월 6일 왜적의 재침으로 시작된 갑진왜란(러일전쟁의 황태연 식 표현)으로부터 하루도 그칠 날 없이 계속된 ‘40년 장기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한다(황태연 외 지음, ‘일제종족주의’, 넥센미디어, 2019, 21쪽). 그 결과가 조국광복이었다는 것이다.카이로선언을 임시정부가 쟁취한 게 맞나? 40년 장기 항일전쟁은 또 무슨 소리? 독립군과 광복군의 육탄·적혈? 우리의 무장 항일독립군과 광복군이 40년간 일제와 하루도 빠짐없이 사투를 벌여 독립을 쟁취한 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부합하는가?마치 한 편의 장엄한 역사소설을 읽는 것 같다. 그런데 사료가 전하는 일제 망국과 관련한 이야기는 황태연 교수 같은 반일 종족주의자들과의 주장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일제 통치에 순응한 이 땅의 백성들그동안 우리는 대한제국이 합병당했을 때 양반 관리·유생·선비와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폭동 반란으로 격렬 저항한 것으로 믿어 왔다. 참으로 미안하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런 일은 전체 백성들 중 지극히 일부의 일이었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일본 천황에게 통째로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대다수 백성들이 보인 모습에 대해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병합’의 저자 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그 어떤 말썽이나 곤란한 상황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 맥을 빠지게 할 정도로 극히 평정한 상태에서 무사히 종료되었다. 병합 발표 후에도 그 어떤 분요(紛擾)를 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예상한 것 이상으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였다.”(이데 마사이치(井手正一) 지음·신동규 옮김, ‘1910년 일본인이 본 한국병합-‘조선사정’과 ‘조선사진첩’’, 동아대학교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 2020, 32~33쪽).이데 마사이치의 증언에 의하면 거의 모든 대한제국 백성들은 한일병합을 환영했다. 상민들은 양반과 관리들에게 생명·재산 등 모든 자유를 박탈당해 왔는데, 병합으로 인해 양반-상놈의 속박에서 벗어나 법률상·사회상 양반과 동등한 인격자가 되었기에 그 기쁨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특히 병합이 다른 나라처럼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빼앗거나, 의회에서 독단적인 결정을 통한 강행이 아니라, 군주의 임의적 판단에 의한 평화적 합병이었음이 특기할 만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한제국처럼 조약을 통해 한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넘긴 사례는 인류 역사상 지극히 드문 사례였다는 것이다(이데 마사이치 지음·신동규 옮김, 앞의 책 37~38쪽).대표적인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거리감이 너무 크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의 주도로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송병준은 조선 내에 친일단체를 설립하라는 일본의 비밀지령을 받고 1904년 8월 18일 유신회를 먼저 조직한 다음 8월 22일 일진회로 개명했다고 한다. 일진회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11월 6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에는 ‘국민신보’를 통해 친일여론 조성에 앞장섰고 고종의 양위 책동, 의병토벌 등 매국 행각에 앞장서 친일 악명을 얻게 되었다.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일진회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실컷 이용해 먹은 후 토사구팽(兎死狗烹)을 한 것이다. 매국행위에 앞장섰던 이용구는 일본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뼈를 묻었다. <계속><출처: 펜앤드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