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개화에 눈을 뜬 동학교주 손병희하지만 일진회는 이것이 활동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묘한 이중성을 띤 단체다. 일진회의 또 다른 얼굴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1894년 12월 우금치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은 3만6000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채 패퇴 소멸했다. 한동안 존재조차 미미했던 동학은 1897년 최시형이 도통을 손병희에게 전수한다. 다음해 최시형이 체포·처형되자 3대 교주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과 함께 평안도·황해도 개항장 부근, 국경 근처에서 상업과 무역을 하며 비밀리에 교세 확장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구 문명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윤정란은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저서에서 서북지역은 중국과의 무역 등으로 조선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고 지적한다. 서북지역은 척박한 농토, 정치적 차별 등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부터 상업에 관심을 둔 결과 서북을 대표하는 기업이 대동상회이고, 진남포에서 등장한 근대적 기업인이 화신그룹을 일궈낸 박흥식이다.손병희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한 덕에 동학은 1900년 무렵 북부 지역에서 교세가 급성장했다. 손병희는 관헌의 추적으로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상헌’이라는 가명으로 일본 정계 실력자들에게 접근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이 과정에서 동학의 실패는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의 부재 탓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손병희는 이광수를 비롯한 64명의 조선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들을 조선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한 원대한 구상이었다. 춘원 이광수가 문명개화의 세례를 받은 것은 손병희 덕분이다.손병희는 구시대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조선 백성과 지도자들의 의식개혁을 통해 자주독립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그는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러일전쟁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국내의 지도층 인사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러시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손병희는 일본이 승리할 것이며, 승자인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유리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위한 응원세력으로 일본을 꼽았다. 일본과 동맹을 맺고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아시아 연대론에 공감했다. 그는 1903년 일본에 협력할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국내의 동학 지도부에게 알렸다.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손병희는 일본 정부에 전쟁기금으로 1만원을 쾌척했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0억원 정도의 거액이었다. 그리고 동학 지도자 40명을 도쿄로 불러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우라”고 명했다.
▣단발흑의로 문명개화에 앞장서다교주의 연설을 듣고 귀국한 동학 지도자들은 1904년 4월 이용구를 중심으로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진보회(進步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진보회는 일본에서 깨달음을 얻은 손병희의 문명개화노선의 결과였다.동학은 진보회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당시 정부는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공표했으나 위정척사 세력을 중심으로 한 양반과 백성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진보회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하루아침에 회원들이 상투를 자르고, 검은색 옷을 입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개혁과 진보, 국정쇄신을 외쳤다. 이후 동학은 진보회, 단발흑의(斷髮黑衣)로 상징되었다.유생들이 위정척사를 외치며 단발령에 저항할 때 진보회가 단발을 지지한 이유는 단발을 하지 않은 비위생적 모습을 야만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명의 기준을 서양과, 서양을 배워 문명화한 일본에 두었기에 그들 도움을 받아 조선이 문명 전보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계속><출처: 펜앤드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