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무렵 진보회는 단발흑의 회원이 100만명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정식 회비를 내는 회원은 14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회비를 내는 회원 수가 14만이었으니 회비를 내지 않는 회원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진보회는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러일전쟁 중 전략물자 수송을 우해 3000명의 수송 인부와 50명의 정찰 인원을 자발적으로 동원했다. 또 황해도·평안도 일대 회원 26만명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경의선 철도건설과 군수품 운반을 도왔다.1904년 8월, 구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유신회(維新會)라는 단체가 출범했다. 이 조직은 송병준을 통해 일본인들과 연결되었다. 이들은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일본군 지원을 받아 활동했다. 일진회는 진보회가 자기들과 비슷한 성격의 단체라는 점을 감안, 진보회와 합병을 제의했다. ▣독립협회를 계승한 일진회손병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4년 12월, 하나의 단체로 통합되었다. 일진회에는 해산당한 독립협회가 참여하여 중앙조직을 담당했고, 동학교단은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동원하여 하부구조를 형성했다. 일진회는 자신들이 독립협회를 계승했음을 선언했다.일부 연구자들은 손병희가 실질적으로 일진회 창립에 관여했으며, 통합 전에 이미 서울의 일진회가 각 지방 일진회의 상부기관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즉 송병준이나 그에게 매수당한 이용구가 아니라, 손병희로 대표되는 동학 세력이 일진회 성립의 주도세력이었다는 주장이다.손병희는 일진회를 통해 일본과 손잡고 러시아에 맞서려 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손병희의 행보를 친일 매국적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다수의 개화 지식인들은 일본이 선전한 ‘문명화’ 논리를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일진회는 문명화론에 입각하여 민권 우선의 애국론을 강조했다. 일진회 강령은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국가기초를 공고히 한다, 둘째,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셋째, 정부 개선정치를 실시하도록 한다, 넷째, 군정(軍政) 재정을 바로잡고 고친다 라고 되어 있었다.이 강령에 기초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실천하도록 압박했다. 일진회는 인민에 대한 학대 금지, 무명잡세 폐지 등 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정부의 악정(惡政)에 저항했고, 힘없는 백성들이 이유 없이 수탈당하면 해결사로 나서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줬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진회 활동을 지지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도 일진회 목적이 선량하여 폭정에 고생하는 양민의 동정을 일으켜 다수의 농상민(農商民)이 회원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일진회는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상공업 활동에 적극 나섰다. 동양주의에 입각하여 경의선 부설공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각종 회사 설립에 앞장섰으며, 농공은행 설립에도 일조했다. ▣손병희는 문명개화, 이용구는 친일로 갈라서이용구는 1905년 11월, 일진회 명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고, 12월 일진회 회장에 올랐다. 1906년 9월 손병희가 일진회 지회 해산을 명하자, 이에 대항하여 동학교도들을 일진회 산하로 끌어들이려다 출교 처분을 당했다. 그는 시천교를 설립하여 교조에 올랐다. 손병희는 1906년 천도교를 세워 일진회와 결별했다. 이로써 손병희는 일진회의 친일 행위와는 절연했다.이용구가 친일의 길로 나간 이유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1893년 출간된 ‘대동합방론’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과는 반대로 아시아인의 연대를 강조했다. 덕분에 책이 출판된 후 한·중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계속><출처: 펜앤드마이크>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