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은 러시아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한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동아시아는 러시아의 먹이로 전락할 것이다. 위기에 대응하려면 동아시아의 황인종이 단결하여 연대세력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다루이 도키치는 세 단계를 제시했다. 1단계는 일본과 한국이 ‘대동(大東)’이란 합방국을 세운다. 2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동맹관계를 수립한다. 3단계는 대동국과 중국을 연합하여 남양제도를 포함한 대아시아연방을 실현한다. 이용구는 이 책에 감명받아 아들 이름을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라 지었다.불행하게도 다루이 도키치의 합방론은 겉은 선린의식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내면에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비수가 숨어 있었다. 1910년 한국병합 강행 두 달 전 재출간된 ‘대동합방론’ 서문에서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과 한국의 연합이 성취되어도 한국인은 합성국의 국가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보호 아래 두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밝혔다.다루이 도키치의 눈에 비친 한국은 문화는 미개하고 정치는 부패했으며 기후는 불순하고 국민은 독립심이 결여된 나라다. 이처럼 빈약한 나라라면 합병을 하지 않는 것이 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루이 도키치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인들이 한국병합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이 질문에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러시아 등 대륙과의 통상을 편리하게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첫째 이익이다.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체구가 장대하고 완력이 강하다. 이들을 일본식 군사제도로 훈련하고, 우리 무기로 무장시키면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두 번째 이익이다”라고 답한다.일본에게 한국이란 대륙 진출의 통로,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방파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일본인들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한 이용구는 친일로 돌진하면서 손병희와는 완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1909년 12월 일진회는 한국 정부를 폐지하고 일본 정부가 직접 정치할 것, 통감부 폐지 등을 주장하는 ‘일진회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용구의 소원대로 한일합방이 성사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용구에게 은사금 10만 엔을 내렸다. ▣한국인들이 선택한 길구한말 나라가 기울어갈 때 이 땅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홉스적 자연 상태였다. 한반도에는 근대 문명을 지향했지만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은 개화파, 민족적 저항은 했지만 봉건적 성격에 머물렀던 위정척사파가 존재했다. 그 시절, 관리들에게 죽어라고 수탈 당하던 이 땅의 불쌍한 백성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하나는 무능·부패하고 미래에 대해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한 채 외세에 빌붙어 권력 유지에 급급한 대한제국 황제의 극악무도한 봉건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비록 이민족이지만 법에 의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문명개화한 일본의 근대화 된 통치를 받을 것인가.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독자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자신의 삶에 유리했다고 보시는가? 앞에서 소개했듯이 이 땅의 민초(民草)들의 절대다수는 일제 통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며 생존을 영위했다. 카스트 제도나 다름없는 양반-상놈의 신분구조에서 해방되고, 악랄하기 그지없었던 대한제국의 패악통치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산 것이 친일이고 천벌을 받아야 할 죄라면, 이 땅에 살았던 민초들 중 죄인 아닌 자 누구인가?<출처: 펜앤드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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