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회적 갈등은 일제의 패망과 이어진 사회적 혼란기, 공권력의 공백 상태를 맞아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된다. 해방정국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이런 사회적 갈등의 폭발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그리고 6.25를 맞아 이런 갈등은 처참한 유혈극으로 현실화됐다. 6.25전쟁 당시 호남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8936명의 65%에 이른다. 그 가운데서도 전남의 피해자가 6만9787명으로 호남 지역 전체의 83%에 이른다(내무부 통계국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1955, 212~213쪽).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그 근저에 해방 이전부터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구조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6.25 당시를 기억하는 광주지역의 원로 한 분은 광주에서 좌우를 구분했던 기준으로 미 공군기에 대한 호칭을 들기도 했다. 미 공군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는 보통 시민들은 “쌕쌕이다”라고 말하는 반면, 좌파 분자들은 “적기다”라고 표현하더라는 것. 그리고 미 공군기를 ‘적기(敵機, 적군의 비행기)’라고 부르던 인물들이 1980년 5.18 당시에도 시민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이런 사회적 갈등은 6.25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쉽사리 진정될 수 없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대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고,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좌우로 갈라진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뻔히 아는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전쟁이 끝났다.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그대로 자리잡고 살 수 있었을까? 좌익들의 경우 고향에 그대로 눌러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당시까지 켜켜이 쌓아온 원한의 당사자인데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좌파 세력과 인민군들은 북으로 쫓겨간 상태였다. 좌파의 핵심 인물들은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가거나 또는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됐지만 좌파 성향 사람들이 모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익명성이 보장된 도시 지역으로 숨어드는 것이었다. 호남에서도 특히 좌우대립이 극렬했고 규모도 컸던 전남의 많은 좌익들은 광주라는 대도시에 흘러 들어가 숨죽여 사는 길을 선택했다.근대의 좌파 이념은 그 출발 단계부터 정치투쟁과 권력 쟁취라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설계됐기 때문에 우파 이념에 비해 대중적 호소력이 강하고, 그 이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피니언리더의 속성을 갖기 쉽다. 6.25 이후 광주로 스며든 좌파 출신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죽여 지냈지만, 알게 모르게 지역사회의 분위기 특히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호남 사회의 저변에 흐르던 이런 분위기가 약간 특이한 형태로 표출된 사건이 있었다. 박정희가 5.16 이후 군에서 전역하고 처음 대선에 나선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일이다. 윤보선을 대선후보로 내세운 야당 민정당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관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은 적이 있다는 것, 박정희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존경했다던 셋째 형 박상희(1946년 대구폭동의 주역으로 경찰의 총에 피격 사망)의 절친으로서 월북했다가 간첩으로 남파된 황태성과 접촉 의혹이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워 박정희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념 공세를 펼쳤다.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여론의 동향을 면밀하게 점검했던 김형욱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의 선거운동 초기에 호남의 여론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당의 박정희에 대한 사상 공세가 거세지면서 호남에서는 오히려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급등하는 추세를 나타냈다고 한다. 야당의 사상 공세가 애초 의도와 달리 정반대 효과를 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호남에서 윤보선을 35만여 표 차이로 따돌렸다. 5대 대통령선거의 전국 집계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겨우 15만여 표 앞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박정희의 승리에 호남이 기여한 몫은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출처: 펜앤드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