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식자들이 5대 대통령선거에서 호남이 박정희를 지지한 표면적 양상만 보고 호남의 보수적 본성을 읽곤 하는데, 좀더 깊은 맥락을 살펴보면 정반대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시 호남은 박정희의 이력과 이념적 배경에 깔린 좌파적 요소를 읽고 거기에 지지를 보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해방 이전의 이념적 분포만 보면 영남이 호남보다 훨씬 좌익에 가까웠다. 일제 강점기에 대구가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것도 그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왜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집권 이후에 호남은 진보좌파의 아성이 되고, 영남은 보수우파의 본향이 됐을까.6.25 당시 인민군의 치하에 들어갔던 호남에서는 처절한 좌우대립과 상호학살로 좌파 엘리트 지식인들이 대거 학살당했다. 목숨을 부지한 좌파 지식인들은 북으로 도주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는 호남 인재의 질적 양적 고갈 사태로 이어졌다.영남의 경우는 좀 달랐다. 해방정국에서 대구폭동 같은 비극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6.25 와중에서 호남과 같은 처절한 내부 대립과 상호학살은 없었다. 이념적 리더들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굵직한 좌파 이념사건을 들여다보면 영남 출신 지식인들이 지도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박정희 정권 당시의 대표적인 이념 사건인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 등 8명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영남 출신이다. 이 사건은 전쟁의 참화를 피한 영남 좌익들의 영향력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이념사건인 남민전 사건에서도 조직의 리더였던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 중에서 이재문과 김병권 두 사람이 영남 출신이다.해방 이전에 교육받은 영남 좌파 지식인들이 6.25전쟁에서 학살을 피해 살아남고 이후 좌파 이념사건의 지도자 역할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평범한 영남 출신들은 해방 이후 본격적인 개발 연대의 주역이 됐다.일제 강점기의 경제 사정은 호남이 영남보다 훨씬 나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이 농지는 더 넓은데 인구는 적었고, 김성수와 현준호 등으로 대표되는 대지주 겸 기업가들의 활동으로 경제적 잉여도 더 많이 산출됐기 때문이다.영남의 경우 경제적 여건이 호남보다 훨씬 열악했고, 그래서 만주 등 한반도 밖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다. 요즘 한국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들의 발음에서도 영남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흔하다. 영남 출신들은 경제적 곤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해외로 떠돌았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국제적 감각과 시장질서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게 됐다.해방 이후 귀국한 이들이 6.25의 참화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기업 활동을 시작하고 대한민국 개발연대를 열어간 주역이 됐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보수의 중심이라는 영남의 정체성이 형성됐다. 호남의 경우 이와는 정반대 경로를 걸었고 그런 차이가 현재 호남의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대한민국 여타 지역 사람들이 호남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은 이렇게 오랜 사회경제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대하 드라마에 대해서는 해야 할 얘기가 더 많이 남아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개발연대 당시에 영남과 호남의 역할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그 차이가 어떤 정치적 인식의 차이로 귀결됐는지, 김대중과 5.18은 이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할 것이다.이 문제의 뿌리를 파고들어가면 근대화라는 우리 현대사의 핵심 화두에 다다르게 된다. 호남과 대한민국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의 진짜 정체도 이 문제로 귀결된다. 현재 호남의 문제는 대한민국 근대화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결과이다. 그 소외와 배제의 결과가 역설적으로 호남의 내면에 각인되어 근대화에 대한 자발적 거부로 귀착됐다는 얘기도 역시 앞으로 할 계획이다.<출처: 펜앤드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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