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기존의 법질서로 수용하지 못하는 헌정의 예외적인 상황은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상황을 다루고 해결책을 제시하여 기존 헌정질서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강화하는 것이 국민국가의 의회와 정당, 정치인의 역할이다. 의회에서 늘 새로운 법안을 심사하고, 기존 법률을 개폐하는 것도 바로 헌정의 예외적 상황을 일상적으로 다루는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정변 등 정치 불안이 일상화되고, 정치가 내전의 양상을 띤다는 것은 정치의 이런 기능이 망가졌다는 의미이다. 정치의 붕괴가 역설적으로 정치 만능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한국의 헌정질서는 매우 취약한 상태이며 국민국가 건설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건국(nation building)의 도정을 걷고 있다. 그 결과가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운명이다. 역대 정치 지도자들은 사생결단의 한국 정치투쟁 전선에서 희생당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런 현상을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고 표현했다. 같은 이름의 책에서 저자는 한국이 오랜 중앙집권의 전통에다 언어와 문화, 인종적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평등한 권력 접근을 의미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치가 소용돌이 같은 치열한 경쟁의 영역이 된 원인이라고 말한다. 문제의 원인을 조선시대 등 한국의 사회문화적 DNA와 습속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정치 과잉의 원인을 조선시대의 영향 또는 한국인들 고유의 습속에서 찾는 것은 일종의 순환논법 또는 동어반복이다. 전통이나 습속은 현재 한국인들의 행동이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차적인 요소이다. 근본적인 요인이 발현할 때 그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본질적인 동력이 될 수는 없다. 개화 이전 외국인들의 조선 방문기에는 조선사람들이 게으르고, 느리고, 소극적이고, 지저분하다는 평가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서두르고 부지런하고 극성이고 깔끔해서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습속도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불안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그건 본질적으로 건국과 동시에 진행됐던 남북 분단의 영향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사실상 남북 분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은 해방 이전 즉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한반도 내부에 잠재해있던 좌우 대립과 갈등이 전면화한 현상이다. 그 갈등이 폭발한 것이 6.25였고, 남과 북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대립 갈등의 해소 즉 통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분단은 근대화의 방향을 둘러싼 대립과 직결되어 있다. 어떤 국민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의 노선 차이에서 연유하는 문제라고 봐야 한다. 구한말 근대화 세력을 대표하던 개화파는 현실 정치에서 처참하게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복벽(復辟) 즉 이씨조선 회귀를 주장한 정치세력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조선이 망한 뒤 10년도 되지 않아 수립된 상해임시정부 헌법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명기했다. 당시부터 우리 겨레는 근대화를 민족사적 과제로 인식하고 승인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근대화는 근대화이되, 어떤 방향의 근대화인가를 두고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근대화는 사실상 서구화이다. 하지만, 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몇천 년에 걸쳐 축적해온 전근대 유산의 위력이 남아있는데다 중화(中華)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중국 민족주의의 요구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근대화 과정의 부작용에 초점을 맞춘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고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근대화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거의 지적 전통이 단절되고 서구식 지식 기반의 축적이 빈약해서 이런 이념적 공세에 저항력을 갖기 어려웠다. 해방 이후 다수의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정치 체제가 사회주의였다는 조사 결과도 그런 현상의 반영이다. 1946년 8월 미군정청이 전국민 8453명을 대상으로 선호하는 정치체제를 조사한 결과, 자본주의(14%), 사회주의(70%), 공산주의(7%), 모른다(8%)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계속> <출처: 펜앤드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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