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 가격 상승과 글로벌 공급병목 장기화로 전세계 인플레이션 공포가 커지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 정상화 속도를 빠르게 하고 있는 가운데,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시장금리가 빠르게 상승할 경우 자산가격 하락, 가계대출 연체율이 상승 등 금융시스템에 부정적 영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최악의 경우엔 내년 물가가 4.6%까지 치솟는 등 고물가 속 경기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난 25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주요 기관들은 내년 소비자물가가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인 2%를 크게 웃돌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은은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대로 내놨고, 기획재정부도 ‘2022년 경제정책방향’에서 내년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2.2%로 제시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2%, LG경제연구원은 2.6%, 현대경제연구원 1.6%, 국제통화기금(IMF)는 1.6%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 원자재 가격이나 미국 등 주요국의 물가 상승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어 물가 상승 압력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달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전년동월대비 6.8% 상승해 1982년 6월(7.1%) 이후 39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미국 등 주요국의 물가 상승은 수입물가 상승,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 등을 통해 국내 소비자물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은에 따르면 2010~2021년 평균 국내총생산(GDP)대비 수출입 비중은 79.6%로 80%에 육박한 상황이다. 2000~2007년 평균 56.4%보다 높다. 그만큼 미국, 중국 등 주요국 수입물가 영향이 커졌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행은 최악의 경우 1년 후인 내년 3분기 물가가 4.6%까지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은이 최근 내놓은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한은이 인플레이션과 경기둔화가 함께 발생하는 `스테그플레이션`을 가정해 스트레스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10%의 극단의 확률로 1년 후 물가가 4.6%로 높아지고 경제성장률은 1.0%로 낮아지는 것으로 시산됐다. 이는 향후 1년 간의 확률분포 중 상위 10% 수준에 해당하는 값이기 때문에 한은 조사국이나 유관기관의 전망치와는 차이가 있다.
한은 관계자는 “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세가 지속되고 글로벌 공급병목 현상이 상당기간 해소되지 않을 경우 수입물가와 기대이플레이션이 크게 상승해 극단의 경우 물가가 4.6%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이 커지면서 미국 등 주요국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될 경우다. 이렇게 되면 국내 국고채 등 시장금리도 가파르게 상승해 가계와 기업의 원리금 상환부담이 커지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 유출, 국제금융시장 불안으로 인한 주가 하락, 원·달러환율 상승 등 금융시장 불안이 커질 수 있다.
한은 역시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이 커지면서 시장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할 경우 기업실적이 악화되고 실업률이 상승해 금융기관의 신용리스크도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가능성은 10%로 낮지만, 2022~2023년 물가가 평균 4.6%, 국고채 3년물 금리가 4.1%로 높아지고 경제성장률이 1%로 낮은 상황을 가정해 한은이 스트레스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스태그플레이션’이 금융기관의 자본비율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의 경우 자기자본비율이 현재 17%에서 2년 후 13.2%로 추락하는 것으로 시산됐다. 상호금융과 저축은행의 자본비율도 각각 6.8%, 11.5%에서 6.1%, 10.1%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따른 시장금리 상승으로 취약차주의 신용리스크가 확대될 가능성도 높다. 현재 가계의 연체율은 역대 최저 수준이다. 한은에 따르면 올 2분기 가계대출 연체율은 0.6%로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낮다. 이는 금융기관들이 고신용등급 위주로 대출을 확대한 데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진 영향이다. 같은 기간 대출액 기준으로 전체 대출에서 고신용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75.5%로 2019년 4분기(73.1%) 보다 2.4%포인트 상승했다.
한은 관계자는 “그동안 고신용자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빠르게 증가해 현재 연체율은 낮은 상황이지만 대출 증가 후 시차를 두고 연체가 늘어나는 특성이 있다”며 “여기에 향후 가계대출 규제와 함께 대내외 인플레이션 압력 증대에 따른 가파른 대출금리 상승으로 부동산 가격 조정이 커지거나 소득감소 충격이 가중될 경우 과다 채무자나 취약차주를 중심으로 연체율이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등 주요국의 물가상승 압력으로 통화정책 정상화 속도가 빨라져 우리나라의 기준금리 인상, 대출금리 등 시장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경우 자산가격이 하락하고 연체율이 상승하는 등 금융시스템 붕괴를 가지고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높은 인플레이션은 기준금리 인상 압력을 높일 수 밖에 없는데 우리나라의 통화정책 정상화로 대출금리 등 시장금리가 오르게 되면 가계의 연체율이 높아질 수 있다”며 “특히 여기에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도 빨라지게 되면 우리나라의 자산시장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현재 성장률은 지난해 낮았던 기저효과를 감안하면 실제 국민들이 체감하는 것보다 높게 나오고 있다”며 “대면서비스 등 체감 경기가 부진한 만큼 현재 상태가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인 것으로 보이는데 기준금리를 올리는 등 통화정책 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부동산 가격 안정화 등 정책적 대응도 함께 해야한다”고 말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등 주요국의 인플레이션으로 수입물가 상승압력이 거의 시차없이 소비자물가로 전이되면서 국내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있다”며 “인플레이션이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물가안정과 실물경기 회복을 모두 고려한 신중한 거시경제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