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길 (숭실대 명예교수)
베트남전쟁 당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을 지낸 채명신 장군이 지난 달 87세로 영면, 국립서울현충원의 병사묘역에 묻혔다. 장군의 묘지는 봉분을 쓰는 여덟 평이지만 사병 묘지는 봉분 없는 한 평짜리다. 그가 생전에 “파월 장병이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고 말한 대로 건군 이후 병사묘역에 묻힌 최초의 장군이 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는 그가 죽은 뒤에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했다. 채 장군은 죽어서도 참 군인, 참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장군과 일반 장병의 묘역을 구분할 까닭이 없다. 국가에 대한 공헌도나 애국심이 계급순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장군이나 병사 할 것 없이 모두 한 평 조금 넘는 넓이의 땅에 묻혀있다.
사선을 넘나들며 전장에서 생활과 전투를 함께한 동료가 전우다. 죽어서도 병사 곁으로 돌아간 장군은 전우애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채 장군의 사병 묘역 안장은 우리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어떤 죽음이든 그 앞에 머리 숙여야하고 어떤 장례든 경건하게 치러야한다. 그러나 장례의 격과 안장장소는 고인의 위대함을 재는 잣대는 아니다. 병사 곁에 묻힌 채 장군의 묘역이 오히려 넓고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은가.
시대상황에 걸맞게 장묘(葬墓)문화를 바꾸어가야 할 필요성은 절실하다.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기 위해서는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해서 지도층이 앞장서야한다. 채 장군의 장례는 단순히 개인차원의 특이한 선행(善行) 또는 결단으로 치부하고 칭송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많은 장성출신들이 채 장군의 뜻을 따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채 장군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이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작은 출발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묘지면적은 전국토의 1%로 공업지역의 약 2배에 이른다. 더 이상 국토가 묘지로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원수묘역의 넓이는 264㎡(약 80평), 묘역으로 이어지는 계단까지 포함하면 495㎡(약 150평)정도로 너무 넓다. 국가원수 묘역부터 줄이자. 작고한 역대 대통령의 장례는 가족의 뜻과 당시의 상황, 국립묘지설치법 등에 따라 가족장과 국민장, 국장 등으로 치러졌다. 최고 지도자의 업적과 역사적 평가는 장례의 격이나 묘역의 넓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묘의 주인은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다. 덩샤오핑의 시신은 화장해서 유골은 남중국해에 뿌려졌다. 덩샤오핑의 묘는 진시황릉보다 오히려 크다는 느낌을 중국인은 갖는다. 덩샤오핑의 묘는 남중국해이고 또한 중국인의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생가 한쪽에 묻혀있다.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베를린 공원묘지에 보통 시민들과 함께 잠들어 있다. 프랑스 드골 전 대통령은 그의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고 고향 콜롱베 공동묘지의 딸 곁에 묻혀있다. 미테랑 전 대통령도 그의 고향마을 가족묘지에 묻혀있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하지만 사람마다 족적과 이루어 놓은 업적이 다르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고 마땅한 예우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 일은 장례를 크게 치르고 묘지를 호화스럽게 만드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대통령이나 장군이나 큰 업적을 이룬 지도자가 일반 공원묘지에 보통사람과 함께 잠들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런 모습을 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흐뭇할까 허전할까.
대통령을 지낸 분들이 어느 전직 대통령보다 장례의 격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소박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고 고향마을에 묻어달라고 하는 전직 대통령들과 채 장군의 뜻을 이어갈 장성출신들, 국민은 그런 지도자를 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