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 원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해 12월19일은 우리나라에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날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1577만3128표로 51.5%를 얻어 상대 후보를 108만496표(13.6%) 차로 이기고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일 기준으로 계산하면 여성이 국가 원수가 된 것은 신라시대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이후 1116년 만의 일이다.
아버지에 이어 딸이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세계에서도 몇 건 안 되는 드문 일이다. 파키스탄의 부토 전 총리, 필리핀의 아로요 전 대통령,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스카르노푸트리 전 대통령,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의원(집권 가능성이 큰 야당 지도자) 등을 꼽는다.
개표 결과가 확정된 직후 나온 보도 내용들을 살펴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등장에 대해 세계 각국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뉴욕타임스는 “수년전부터 기업과 정부에 여성들의 진출이 늘었지만 아직 매우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고 평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유권자들이 경제와 안보를 확립한 박정희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재현해달라는 바람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AP통신은 “한국의 첫 여성대통령으로 30여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왔다”고 묘사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전 통치자의 딸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살하도록 한 원수(김일성)의 손자(김정은)와 마주하게 됐다”고 묘사했고, 중국 CCTV는 “중·한 관계를 더 긴밀히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일본 NHK는 “박 당선인은 한일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일본군위안부, 독도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국내외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며 출범한 박근혜 정부 원년의 정치 성적표는 초라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참담하다고 해야 좀 근접할 정도로 밤낮 없는 정쟁에 휘말려 헤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새 정부의 이념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인 취임 첫해를 허송세월한 셈이 됐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에 발목이 잡혀 지난 1년간 안보 복지 민생경제 기업 활성화, 국가경쟁력 강화 등 시대가 요구하는 시급한 일들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전임 이명박 정권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발표로 불러온 광우병 촛불 시위로 출범 초기에 암초에 걸렸고 이후 국정의 추진 동력을 상실했던 것과 유사하다.
야당은 국회 대신 장외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덕분에 법률안은 12월 초까지 법안을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국회의원들은 초장기 태업을 강행했다. 인사청문회도 파행됐다. 국무총리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검찰총장 등 부처 장관인선뿐 아니라 감사원장 선관위원장 방송통신위원장 국민권익위원장 등 헌법기관의 수장 인사청문회까지도 세력대결 와중에 후보자가 중도사퇴하거나 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정치권은 소통과 협력을 통해 국가적 난국을 극복해 나가겠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고, ‘정치 실종’이라는 오명을 쓸 정도로 비생산적인 행태를 보였다. 여야가 싸움에 몰두하느라 국정과 민생은 팽개쳐진 한해였다.
이번 19대 국회는 임기 시작부터 개원에 몇 달씩 뜸을 들이더니 금년도 예산안의 법정 심의 기일을 넘겨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새해 1월1일 새벽에 정부의 준예산이 시행되기 몇 분 전에서 겨우 통과시켰다. 박근혜 정부에서의 국회운영 예고편을 보여준 격이 됐다.
8월1일부터는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장외투쟁을 시작해 국회가 본격적으로 절름발이 상태에 빠졌다. 김 대표는 국정원 댓글 대선개입 국정조사 건을 놓고 여당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지난 7월31일 장외투장을 선언했다. 여야는 국정원 댓글 국조의 조사대상, 증인신청, 회의공개 여부 등을 놓고 20여일간 평행선을 달려왔고, 국민적 관심사였던 NLL포기 발언 의혹이 제기되자 야당은 이것이 국정원 국조를 덮기 위한 정치공작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장외투쟁 중에는 법안처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갖고 있는 다수당임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한 건도 심의 처리하지 못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주도해 18대 국회에서 만든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이 천재지변이나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면 의안을 직권상정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법안처리의 관문인 법제사업위원회가 열리지 않을 때도 재적의원의 3/5 이상이 찬성해야 본회의에 직권 상정할 수 있는데 이는 야당이 일부라도 참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숫자이다.
국회가 파행되는 바람에 정부가 요구하는 부동산활성화 법안, 외국인투자촉진법, 서비스산업기본법안 등 주요 경제 활성화 법안을 비롯한 경제·민생 관련 법안들이 무더기로 적체돼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국회가 계속 공전되면서 지난 12월2일까지 해야 할 내년도 예산안 처리가 지난해에 이어 또 다시 법정 시한을 넘겼다. 2003년 이후 올해로 11년째다. 국회 무용론, 나아가 국회 해산론에 이어 국회의원들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도 빗발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65세 이상인 모든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하겠다는 기초연금이 정부출범 이후 경제상황 악화와 재정압박 등을 이유로 퇴보했다. 여당은 경제현실과 재정능력을 고려해 정부의 국민연금 수령과 연계해 하위 70%에게 차등지급하기로 한 정부의 입장을 옹호했고, 야당은 즉각 공약사기라고 성토하고 나서 정국은 또 다시 경색됐다. 정부는 지난 11월19일 국무회의에서 최소 10만원~최대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기준 연금액을 해마다 물가상승률에 따라 인상하되 5년마다 적정성을 평가해 조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기초연금법안을 확정했다.
기초연금 후퇴를 놓고 복지부장관이 반발성 사퇴를 행한 것도 박근혜 정부에 타격을 줬다. 진영 복지부 장관은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차등지급하는 것이 대선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사퇴를 감행했다. “소신있는 처신”이라는 평과 함께 “주군을 위해 몸을 던져야 할 장관이 일신의 안위만 챙기는 배신행위”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대선불복 발언은 지난 11월22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수 박창신 신부 등 사제들이 군산 수송동 성당 시국미사를 열고 “지난해 대선에서 국가기관을 동원한 불법 선거가 자행됐다”며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한 것이 처음이다. 즉각 정치 사회 전반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새누리당은 “북한이 최근 반정부 대남투쟁 지령을 내린 이후 대선불복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비판했고, 반대로 민주당은 “성직자가 현실 정치를 거론해야 하는 현 상황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라며 “사제단의 지적은 현 정권이 자초한 것”이라고 옹호했다.
올해는 정치인들의 막말이 유난히 심했다. 하이라이트는 민주통합당 홍익표 의원이 지난 7월11일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한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 발언’. 홍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귀태’로, 박근혜 대통령을 ‘귀태의 후손’으로 비유했다. 청와대는 민주당 의원의 막말에 대해 “대통령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 양승조 최고위원은 12월9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암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말해 정치권에 막말 파문이 확산시켰다.
양 위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라는 무기로 공안통치와 유신통치를 했지만 자신이 만든 무기에 의해 자신이 암살당하는 비극적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 대통령은) 국정원이라는 무기로 신공안통치와 신유신통치로 박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청년비례대표인 장하나 의원이 ‘대선불복 및 박근혜 대통령 사퇴, 보궐선거 실시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새누리당은 장하나 의원과 양승조 최고위원의 사과와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지만 양 최고 위원은 모 방송에 출연해 “제 말은 언어 살인이 아니다. 제명 운운하는데 어떤 명분으로 제명한다는 것인가”라고 반박했다.
우파성향의 정치평론가들은 장의원의 대통령사퇴 요구 발언이 민주당의 주장처럼 당 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돌발적 발언이 아니라 의도되고 기획된 발언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재선이 불투명한 초선 비례대표를 희생시켜 정치적 금기를 깨뜨리고 나면 민주당 뿐 아니라 다른 야권에서도 쉽게 거론할 수 있는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대선불복’ 아이템은 앞으로도 보수-진보 투쟁의 핵심 주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동안 조용하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15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노무현 재단 송년행사에서 “올해 두드러지게 기억나는 북한의 장성택 처형과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사건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위대한 수령의 손자가, 남한은 반인반신(半人半神) 지도자의 따님이 다스리고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을 ‘박근혜씨’, 또는 ‘박통2세’라고 호칭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은 “전직 장관의 국가관에 경악을 금치 못 한다”며 “국민들은 통합진보당과 친노가 초록동색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