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 (사)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로 전국이 들썩이는 중에 북한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북한 신문을 검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만은 남북이 교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일방적인 수용이긴 하지만, 현재의 남북 현실에서 아리랑만은 교류가 진행 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를 북한의 관현악아리랑이 남측에서 연주된 사례와 남측 아리랑 보도를 북한 매체가 수용한 사실을 대비함으로써 확인하였다.
남측은 1990년대 들어 북한 공훈예술가 최성환(1936~1981)이 1976년 작곡한 `관현악아리랑`을 최근까지 50여회 연주해오고 있다. 1978년 일본에서 재일 음악가 김홍재에 의해 처음으로 연주되면서 우리에게 알려진 작품으로, 1990년 남북단일팀 단가 합의시 북측이 제시한 음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국내 음악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소개된 것은 1990년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한 남측 작곡가 박범훈(당시 중대 교수)이 평양교향악단을 지휘, 연주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직접 전해진 것은 2000년 8월 18일 서울에 온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예술의전당 공연이 계기다. 단독공연과 KBS교향악단과의 합동연주로 관현악아리랑을 연주한 것도 특기할만 하지만, 국내 지식인들에게 아리랑으로 `감동`을 느끼게 한 연주였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이어 이 작품은 2001년 6·15공동선언 기념 인사동아리랑축제에서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지휘 장동진)에 의해 국내 일반인 대상으로 연주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미국 백악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적인 북한 특사 조명록(1928~ )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북미 고위급회담을 위해 2000년 10월 9일 미국을 방문했을 때 펜타곤 의전 담당에게 "나를 위해 연주를 할 기회가 있다면 이 아리랑을 연주해 달라"며 제시한 악보가 이 작품이었다고 알려지면서 부터다.
한편 음원으로서 보급된 것은 신나라레코드의 음반 `아리랑환상곡` 발매로부터다. 이 음원을 접하게 되면서 지방의 소규모 악단에서도 이를 연주하게 되는데, 최근까지 크고 작은 공연을 합치면 50여회나 되어 관현악곡으로서는 단연 인기곡이다.
이러한 현상은 북한의 편성이 배합 관현악, 즉 서양악기와 국악기에 의한 편성이므로 서양악 오케스트라나 국악 오케스트라가 모두 연주하여도 그 주제를 살릴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현재로서 남북한에서 해외 연주자에게 제시할 만한 아리랑 주제 작품은 이만한 것이 없다고 볼 때 남북에서 아리랑 `스탠더드 레퍼토리`인 셈이다. 이는 분명한 아리랑 교류의 증거이다.
반면, 북한도 남측 아리랑 자료를 수용하여 나름의 아리랑 교류를 하고 있다. 남측이 발표한 아리랑 자료를 수용하고 있음에서 확인되는데, 다음 사례는 `아리랑 발굴 자료`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일 뿐이므로 더 많은 사례가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대표적인 사례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는 1986년 9월14일자 조선일보에 공개한 선교사 H B 헐버트가 1896년 채보한 아리랑 악보를 1990년 기관지 `문화예술`에서 "최근 남측 신문이 발표한 최초의 아리랑 악보는 우리 함경도에서 부르는 아리랑이므로 1896년 이전에 서울에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인용했다. 이는 최초의 서양악보로 채록된 아리랑의 실체에 대해 북한도 주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례는 2005년 8월15일 KBS 9시 뉴스를 통해 김지연이 편찬한 가사집 `조선민요 아리랑`에 친일 내용인 `비상시 아리랑`이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인데 이를 통일신보가 2005년 11월12일자에서 보도한 기록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소중한 아리랑을 왜곡해 저들의 침략전쟁의 도구로 이용한 것은 겨레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조선민족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애버리려 한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국내의 보도 내용은 총독부 촉탁으로 아리랑을 조사하여 1930년 기관지 `조선`에 2회 발표한 김지연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는데, 5년 후 이를 모아 발행한 단행본 `조선민요 아리랑`이란 책에서 `비상시아리랑`이 확인됨으로써 과거의 조사가 순수하지 못한 식민정책, 황민화정책 수립을 위한 작업이었음 확인했다는 것이 요지다. 바로 이 보도를 북한 신문이 받아 수록한 것이다.
다음 세 번째 사례는 금년 8월14일 KBS 9시 뉴스를 통해 일제가 아리랑을 식민정책 수립에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 자료(신나라레코드 김기순 회장 소장)를 발표했는데 이를 북한이 수용한 사실이다. 당시 국내 뉴스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일본이 우리 아리랑의 가사와 내용을 체계적으로 왜곡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 민족의 혼이자, 저항의 상징인 아리랑을 한일합병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이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일본 동경 박문관이 발행한 `한국 사진첩`에 실린 아리랑은 가사가 달라졌다. `러시아 같이 큰 나라도 전쟁에서 패했으니 조선인들은 한일병합에 응하라.` 이런 조작에 앞서 1905년 4월, 일본 지식인 오키타 긴조가 쓴 `이면의 한국`이라는 책도 아리랑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는 아리랑을 `망국의 축도`로 정의하고, 국가의 일에 무관심과 무저항, 은둔과 무사안일을 `아리랑 주의`로 표현했다. 또 아리랑은 한국인의 두뇌를 어지럽히고, 비굴하게 만드는 큰 위력을 가진 노래라고 적었다. 아리랑을 폄하함으로써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부추기고 일제에 대한 저항심을 말살하겠다는 의도이다."
이상의 보도를 북한은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8월20일자와 9월18일자에 걸처 인용 보도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 왜곡행위, 남조선 방송이 폭로`(민주조선 8월20일자)
"평양 8월19일발 조선중앙통신-14일 남조선 KBS 방송이 일제가 조선민족 말살을 위해 우리민족의 상징으로 알려진 아리랑까지 왜곡하며 악랄하게 책동한데 대해 폭로했다. 방송은 일본이 을사조약을 날조하기 전부터 아리랑을 합병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려고 가사와 내용을 체계적으로 왜곡해 왔다고 밝혔다."
`아리랑 민족 모독죄를 용서 못한다`(민주조선 9월18일자)
"최근 일제가 아리랑의 민요 가사를 제멋대로 왜곡한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 전체 조선민족의 한결 같은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노래 아리랑은 우리민족이 간직한 지향과 사상감정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하여 수수년년을 내려오면서 조선인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일제가 세상이 공인하는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왜곡하고 아리랑에 칼질을 한 것은 우리민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며 역사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흉악한 범죄이다."
이상과 같은 남북의 사례에서 볼 때 비록 합의에 의한 교류는 아니지만 분명 아리랑 교류임은 분명하다. 현재 6·15공동선언에 의한 남북관계는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이며 이를 전제로 한 통일방안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3단계로, 그 첫 단계인 `교류와 협력` 단계에서 아리랑만은 실천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아리랑의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 즉 민족 문제 해결에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 역할은 세계 보편 가치로서 세계화의 실질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1주년을 보내며 이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