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재 / 언룐인
질병은 엄청난 경제적 파장을 몰고 온다. 방역을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방역에 구멍이 뚫리면 국민 경제 전체가 휘청거린다. 오랜 세월이 흘러야 후폭풍을 극복할 수 있다.
페스트도 그랬다. 인류 역사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래서 `흑사병(黑死病)`이라는 섬뜩한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한다. 흑사병의 전파 속도는 조류인플루엔자(AI) 이상이었다. 쥐벼룩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병을 옮겼다.
1331년 중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불과 17년 만에 유럽까지 결딴냈다. 흑사병은 아시아지역에서 25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후 1347년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했다. 쥐벼룩은 대나무를 쪼개는듯한 기세로 유럽대륙을 질주했다. 1348년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유럽 곳곳에서 숱한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쓰러졌다.
영국에서는 1348년부터 1350년까지 인구가 30~40%나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절대 인구 감소는 경제 전체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 당시 주력 산업은 농업이다. 농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생산함수에서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노동력 감소는 곡물 생산 격감을 가져왔다.
높은 임금을 주고라도 일꾼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인 존 고어(John Gower)는 "일꾼들은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다. 이런 사람들조차 구하기 어렵다. 하는 일도 없는데 소작료는 엄청나게 요구한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지주들은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소작료를 올리지 않으면 땅을 놀려야 했다. 상당수 지주가 울며 겨자 먹기로 소작료를 올려 줬다. 생산 비용이 치솟다 보니 곡물 가격도 당연히 뛰어올랐다. 영국 전역에서 이른바 `비용 상승(cost push)` 인플레이션이 빚어졌다.
소작농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작료 이상으로 곡물이나 다른 상품 가격도 치솟았기 때문이다. 영국인 모두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에드워드3세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1349년 `노동 규제법`을 발표했다. 사상 최초의 노동 관련 법이다. 임금, 즉 소작료를 동결하는 동시에 가격을 통제했다. 60세 이하는 노동을 의무화했다. 다른 일터에서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가며 노동자를 스카우트하는 것도 금지했다.
어떤 규제도 시장 앞에선 무력하다. 노동 규제 조치는 원하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동자 부족에 따른 소작료 및 곡물가격 상승 현상은 약 100년간 지속됐다. 토지에 대한 소작농 비율이 흑사병 발병 이전 수준을 회복하자 인플레이션도 진정됐다.
노동자에 대한 규제는 계속 이어졌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영국 의회는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했다. 노동자들을 정면으로 겨냥한 규제 조치였다. 노동조합 결성과 단체협상을 금지했다.
극심한 공포감이 이런 규제를 부추겼다.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 영국 지배층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프랑스가 영국을 본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프랑스에서도 왕과 귀족간의 과두정치(寡頭政治)가 실현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귀족과 왕이 나란히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노동자들의 단결 움직임은 지배층의 공포에 불을 질렀다.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졌다. 민중 봉기의 싹을 짓밟기 위해서였다. 스파이를 심어 놓고 투쟁을 부추긴 후 강경 진압을 일삼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자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프랑스의 공포가 사라진 데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동정론도 확산됐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개혁 노력이 큰 몫을 했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입장이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 쪽이 얻으면, 다른 한 쪽은 그만큼 잃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대부분 약자로 평가된다. 한 달이라도 임금을 받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힘겹다.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를 무시하면 생존권적 기본권은 구두선(口頭禪)으로 전락한다.
노동조합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코레일의 경우 `브랜드 이미지 실추`를 이유로 위자료까지 청구했다. 유형자산 파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무형자산 피해까지 주장하는 것은 상식 밖이다. 남소(濫訴)를 통한 노동조합 길들이기 시도로 비쳐진다. 이러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마저 무력화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