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뉴시스 논설고문
종업원 300여명인 경기도내 중소기업 S사. 연간 매출은 700여억원이나 대기업에 목을 맨 부품업체여서 영업이익은 적자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다. 업력 30년이지만 아직도 원청업체 실무자가 부르면 사장이 바로 쫓아가 저자세를 보여야 한다.
원청업체 호황으로 수년간 외형은 늘었어도 매년 납품단가를 낮추라는 압력 때문에 이익은 외형 증가만큼 늘지 않는다. 그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망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니 종업원 복지, 신규설비, 연구개발 등 회사 업그레이드는 엄두도 못 낸다.
사장은 종업원들이 조금 더 창의적으로 열심히 일해 기술력 등 역량 부족으로 인한 애로를 상쇄해주길 바라고, 종업원들은 사장이 급여를 조금만 더 주면 더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가능해 보인다. 사장은 종업원들이 원하는 만큼 급여를 줄 돈이 없고, 급여가 낮으니 창의력을 발휘해 줄 유능한 인력을 구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사장은 그나마도 직장이라고 종업원들이 붙어있어 주는 게 고맙고, 종업원들도 생산성 낮다고 자르지 않고 쥐꼬리만한 급여라도 거르지 않고 매달 꼬박꼬박 챙겨주는 회사가 고맙다는 생각도 없지 않는 것 같다. 안녕들 한 것 같지 않으면서 안녕들 하거나, 안녕들 한 것 같으면서 안녕들 하지 못한 것이 이 회사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중소기업이 S사 하나뿐일까? 아닐 것이다. 독자기술, 독자상품, 독자시장을 갖추지 못한 중소기업, 즉 협력업체라는 이름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대기업에 납품하는 우리나라 중소기업 거의 전부가 S사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기업은 사람인데, 전망 없는 중소기업에 좋은 인력이 스스로 찾아올 리 없고, 있는 인력이라도 재교육 제대로 시켜 유능하게 키우고 싶지만 그럴 돈도, 시스템도 갖출 수 없는 게 대부분 우리 중소기업의 실정이다. 사장의 비전이 아무리 좋아도 인력과 시스템이 없으니 불가능한 꿈이다. 비전은커녕 먹고 살 수만 있다면, 회사가 망하지만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는 중소기업 사장들이 더 많다.
종업원들도 마찬가지. 실업자가 아니란 사실, 아무리 작아도 급여는 받는다는 사실에 안도한 나머지 더 이상의 자기발전은 뒤로 미룬 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는 대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다.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런 중소기업들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중소기업들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SK텔레콤, 대우건설 같은 대기업을 받쳐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중소기업들이 그나마 밑에서 받쳐주지 않는다면 삼성전자 아니라 삼성전자 할아버지라도 당장 운영이 중단될 것이다. 그게 우리나라 산업생태계인 것이다.
만약 이런 중소기업 사장들이 원대하면서도 알찬 비전을 갖고, 이런 중소기업의 종업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성취동기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경제적 업그레이드는 훨씬 이른 시일 내에 달성될 것이다. 지금 수준의 중소기업으로도 어쨌든 대한민국은 돌아가고 있는데, 이들의 수준이 약간이라도 더 높아진다면 대한민국 성장엔진의 동력은 훨씬 더 강력해질 거라는 말이다.
S사는 얼마 전부터 전문 컨설턴트를 초빙,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조직 활성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불가능한 유능한 인재 초빙은 포기하고, 대신 있는 직원이라도 잘 활용해야겠다는 사장의 비장한 각오로 시작된 것인데 아직 진행 중이어서 효과를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켜본 사람들은 벌써 종업원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업무효율에도 긍정적 변화가 감지된다고 전한다. 사장의 비장한 각오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