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범 / 맥신코리아 대표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태풍 앞의 촛불 신세이다. 러시아 의회(상원)가 우크라이나에서 자국 이익 보호를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한 후 러시아는 대규모 병력을 크림반도로 이전시켰다. 우크라이나가 굳게 믿었던 미국과 유럽은 말로만 러시아에게 견제구를 던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디폴트 일보 직전인데도 유럽연합과 미국의 경제지원은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이다. 러시아의 경제적 지원은 달콤하나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어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세계 3위의 핵강대국이었던 우크라이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크라이나 안보와 영토의 불변성을 굳게 보장했던 핵보유 5개국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일까? 북핵 해법으로 자주 인용되던 ‘우크라이나 핵폐기 프로그램’ 모델은 이제 공염불이 된 것일까? 구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유학중이던 필자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경험을 했다. 에피소드1. 구소련에 유학 간지 얼마 안 된 1992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잘못 건 러시아인은 필자가 외국인 것을 알고는 갑자기 이상한 제안을 했다. 탱크, 기관단총, 헬기 등 러시아산 무기를 살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당황스럽지만 호기심이 발동한 필자는 세세한 무기 목록과 가격 등을 물어보았었다. 당시 구소련 독립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무기를 외국에 파는 일은 거의 일상사나 다름없었다.  에피소드2. 1992년 여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크림 반도 인근) 항구에서 출발한 러시아유람선을 타고 한 15일 정도의 여행을 했었는데, 귀항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출입국 경찰에게 억류되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법이 개정되어 외국인의 러시아 출입국 비자가 더 이상 우크라이나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벌금을 물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법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에피소드3. 오데사에서 우크라이나 키에프로 여행을 갔다. 유람선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의원이 자신의 집에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술자리에서 의원은 우크라이나가 “왜 독립해야 했는지, 구소련 시절 러시아로부터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았는지” 독립투사처럼 역설해서 적잖이 감동받았다. 하지만 술자리 말미에 의원은 필자에게 슬며시 말했다. “한국에서 비밀통장을 개설할 수 있나?”  러시아·우크라이나는 한·일 관계와 매우 비슷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같은 슬리브 족이지만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를 각각 쓰는 다른 민족으로 분화했다. 우크라이나는 13세기 타타르족의 침략을 당한 이후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침략과 지배를 당한 굴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19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고, 1922년 소연방에 강제합병되었다.  1991년 소연방 해체 이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실질적 독립기간은 23년에 불과한 셈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한마디로 애증(愛憎)의 관계이다.  1991년 12월 26일 소연방의 해체는 갑작스런 일이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최고회의의장, 스타니슬라프 슈스케비치 벨로루시 대통령이 모여 소연방을 공중분해 시키고 15개 새로운 국가를 독립시켰다. 하지만 신생국가 3개국에는 아주 위험한 물건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에는 176개의 핵미사일과 1800여기의 핵탄두가 있었고,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에는 각각 1,410개, 825개의 핵탄두가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는 각각 세계 3, 4, 5대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던 것이다. 아직 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한 나라의 핵무기 소유는 전세계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스는 1994년까지 러시아에 핵무기를 이양하였지만 유독 우크라이나만 좌고우면하며 시간을 끌었다.  당시 크라이나 군부와 의회는 핵무기가 없는 우크라이나는 언젠가 러시아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주권이 훼손당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몇 가지 국내외적 상황이 놓여 있었다. 첫째, 무엇보다도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다. 둘째, 핵무기를 운용할만한 전문적인 인력과 시스템이 부족했다. 셋째, 강대국들이 강력하게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소유를 반대했다. 넷째,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트라우마’가 있었다.다섯째, 정치가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보유·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항공모함도 중국에 팔았을 정도였다.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설득하기 위해 1994년 부다페스트에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5대 핵보유국이 우크라이나 주권과 안전을 보장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우크라이나는 5대 핵보유국의 안전보장 약속과 4억 6000만달러에 달하는 경제지원을 받고 핵무기 전량을 1996년 러시아에 양도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였다.  20년이 지난 2014년 현재 러시아 군대는 크림반도에 진격하여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는 심각히 훼손되었다. 러시아는 소위 `살라미(흥정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눠 야금야금 실속을 챙기는 전법)`식 전술을 이용해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시키고 친(親)러시아 자치공화국으로 만들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이런 러시아에게 강력한 수사를 사용해 비판하겠지만 직접적인 무력개입을 꺼릴 것이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뿐만 아니라 공업지역인 동부 지역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강대국의 약속을 믿었던 순진한 우크라이나는 결국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핵무기를 포기했던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몰락한 것을 목격한 북한은 더욱 핵무기 보유에 혈안이 되었었다. 이런 북한을 달래기 위해 제시되었던 것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경제보상을 받아 경제발전을 이뤘던 ‘우크라이나모델’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군대에 유린되는 것을 본 북한은 “역시 핵무기가 최고야”란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선 핵폐기, 후 보상’이란 당근이 더 이상 북한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달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을 위해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통일대박’을 위해서는 북의 핵무기 포기가 선행되야 하는데,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한국의 고민이 더 늘 수밖에 없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