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재 / 언론인  낙인은 배제의 상징이다. 특정인이나 특정 계층을 분리, 배제하기 위해 활용한다. 다수 또는 지배층은 이런 배제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강화한다. 장애나 질병, 인종·민족적인 차이는 물론 재산상의 차이도 낙인의 이유가 된다. 그리스어로 낙인의 어원은 `표시(marking)`다.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범죄자, 노예, 포로 등의 얼굴이나 몸에 낙인을 찍었다. 낙인은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자신의 몸에 낙인이 찍히면 치욕으로 여긴다. 영국의 엘자리베스1세는 어릴 때부터 낙인의 아픔을 체험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 앤 볼린을 간통을 이유로 참수형에 처했다. 엘리자베스가 불과 세 살 때였다. 그녀는 사생아로 전락했다. 공주로 불리지도 못했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제외됐다. 헨리 8세가 죽은 후에도 삶은 계속 꼬였다. 이복언니 메리 1세는 엘리자베스를 런던탑에 가둬놓기도 했다. 늘 감시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위협을 이겨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뛰어난 군주였다. 왕권 강화를 통해 교황청의 입김을 차단했다. 이복언니 메리1세부터 첨예화된 종교 갈등은 자연스레 해소됐다. 세력균형 정책을 통해 스페인을 견제하면서 영국을 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엘리자베스1세의 최대 치적으로 사회복지정책을 꼽는다. 엘리자베스는 빈민 구제를 위해 구빈법(救貧法, Poor Law)을 도입했다. 모직공업 육성 과정에서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일어나자 상당수 농민들이 정든 땅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졸지에 부랑자로 전락했다. 구빈법은 이들을 구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구빈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노동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노동을 강제했다. 저항하면 투옥됐다. 빈곤 가정의 어린이는 길드의 도제(apprentice)생활을 강요당했다. 노동 능력을 상실한 빈민만을 지원 대상으로 삼았다. 구빈법은 사회복지제도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하지만 국가가 빈곤 구제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선언한 데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민들이 부담하는 재산세로 빈민 구제를 위한 재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의 교구 차원에서 빈민을 도왔다. 재정이 열악한 교구에서는 빈민 유입을 적극 저지했다. 구빈법은 여러 차례 개정됐다. 하지만 핵심은 바뀌지 않았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빈곤은 개인 탓으로 돌렸다. 노동계급의 불만이 사회 불안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아울러 국가의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낙인` 전략을 동원했다. 수혜 대상자는 `극빈자(pauper)`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이나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삶을 꾸려가는 사람은 바람직한 사회 구성원인 반면 극빈자는 `도덕이나 수치심을 모르는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1834년 제정된 신구빈법(The New Poor Law)은 `낙인` 전략을 적나라하게 반영했다. 신구빈법은 "공적 부조의 수혜 대상은 결코 최저 생활 노동자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면 안 된다"고 못박았다. 이른바 `홀대의 원칙(Principle of Less Eligibility)`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이주의 자유와 선거권마저 박탈당했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자존(自尊)도 필수다. 상당수 빈민들이 구제 신청을 거부한 채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를 택했다. 빈곤층의 자살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기초생활보장제를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보완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선별적 복지의 그물은 성기다. 대상자들이 우수수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선별적 복지 제도아래서는 무자격자가 혜택을 누리기도 한다. 수십억원의 자산가들이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리다가 뒤늦게 적발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보완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아우성을 친다. 이런 과정에서 또 다른 수혜 대상자가 배제된다. 더욱이 선별적 복지는 `낙인`을 내장하고 있다. 상당수 사람들이 선별적 복지의 수혜를 꺼리는 데는 `낙인`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몹시 어려운데도 "어렵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절대적 빈곤 해결은 투 트랙(two track)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보편적 복지가 병행돼야 한다. 모두가 답을 알지만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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