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그 자리에 감지덕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후자는 ‘2인자’라는 자리를 ‘1인자’로 올라서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한다. 그 차이는 1인자와 2인자의 위상에서 결정된다. 1인자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면 2인자는 숱한 아랫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피핀은 프랑크 왕국의 2인자로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렸다. 치밀한 정지작업 끝에 모시던 왕을 쫓아내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실력도 있었지만 운(運)도 따랐다. 피핀은 프랑크왕국의 재상(宰相)집안 출신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게르만족 출신의 클로비스는 5세기 말 프랑크왕국을 세웠다.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망라한 대제국이었다. 그는 제국을 세운 후 ‘메로빙거 왕조’를 열었다. 게르만족은 ‘분할상속제’를 전통으로 삼았다. 이 제도는 부족 단위로 생활할 때는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쪼개진 땅을 기반으로 다시 영토를 넓혀나갔다. 하지만 왕국이 들어서자 걸림돌로 작용했다. 왕국을 형제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끊임없는 반목과 갈등이 이어졌다. 왕국의 분열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호족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피핀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732년 재상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 세력을 격퇴했다. 피핀 집안의 권력 기반은 더욱 강화됐다. 카를 마르텔이 죽고 나자 피핀은 형 카를로망과 함께 프랑크왕국을 분할 통치했다. 피핀도 일단 ‘분할상속제’를 존중했다. 하지만 이복 동생 그리포는 무시했다. 그리포는 권력 배분을 요구했지만 본전도 못 건졌다. 피핀은 그리포를 수도원에 감금했다. 피핀 형제는 야만족을 잇달아 제압하며 권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행운의 여신은 피핀을 향해 미소를 던졌다. 카를로망이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형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여생을 하느님에게 바치겠다”며 수도원으로 떠났다. 피핀은 이제 유일한 절대권력자로 떠올랐다. 피핀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왕의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정당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교황의 자문을 얻었다. 피핀은 자카리아 교황에게 “프랑크 왕국의 왕은 실권이 없는데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가?”라고 물었다. 교황은 피핀이 원하는 답을 들려줬다. 교황은 “지금 상황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며 “힘이 있는 자가 왕이 되는 게 맞다”고 답했다.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수도원으로 쫓아냈다. 피핀은 ‘찬탈자’라는 비난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신의 즉위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하려고 했다. 교황은 훌륭한 협조자였다. 교황은 즉위식에서 피핀에게 성유(聖油)를 부어줬다. 이는 곧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뜻이다. 마치 신(神)이 왕권을 부여한 것처럼 이벤트를 벌인 셈이다.공짜는 없는 법이다. 피핀은 두 차례의 원정을 통해 이탈리아 롬바르드 지방에서 랑고바르드족을 쫓아냈다. 그 땅을 교황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피핀과 교황의 ‘물신교환(物神交換)’이었다. 피핀은 신(神)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교황은 땅을 얻었다. 개헌 논의가 고개를 들다가 다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청와대의 노골적 거부감도 크게 작용했지만 국민의 공감을 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제’라는 단어에서 보듯 ‘제도적 권력 배분 및 조정’이 유일한 개헌 포인트로 부각된다. 누가 보다 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을 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피핀이 교황과의 거래를 통해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로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려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권력구조 변경 이상으로 시급한 과제도 많다. 대표적인 게 중앙과 지방정부의 역할 분담이다. 여야 모두 ‘균형 발전’을 외치지만 넘어야 할 장벽은 만만치 않다. 노무현 정부는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재정을 대대적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고민하다가 백지화하고 말았다. 중앙정부가 교부금을 지방 정부에 차등 배분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빚어질 것으로 우려됐기 때문이다. 정교한 준비 작업 없는 재정 이관은 지방간의 격차를 더욱 심화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권력 구조에만 초점을 맞춘 개헌은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없다. 국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종합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는 한 개헌은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정문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