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국정 농단’은 어느새 꽤 익숙한(?) 용어가 됐다. 농단(壟斷)이란 맹자의 공손추(公孫丑)편에 나오는 용어로, ‘교활한 사람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익을 독점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국정 농단은 ‘권력을 틀어쥐고 엄중한 나라의 일을 장난치듯 멋대로 처리하며 사익을 챙기는 행위’쯤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어 보인다. 국정 농단은 근래 임기가 끝나지 않은 대통령을 억지로 탄핵하고 정권까지 바꿔 버린 무서운 내용과 뜻을 지닌 교훈과 역사적 함의로도 우리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국정 농단이란 프레임을 걸어 남을 무너뜨린 주체라면 본인 스스로는 똑같거나 비슷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또 이치적으로 상식이자 도리다. 정적을 끊임없이 물어뜯고 몰아붙여 도저히 못 견디게 만들어 기어이 끌어내린 정치인이 설혹 세부 내용은 다소간 차이가 있더라도 원리적으로 비슷한 종류의 일을 자행하면서 부끄러움이 조금도 없고 양심이나 도덕마저 팽개친다면 정치 이전에 인간성부터 살펴봐야 한다. 남의 행동을 비난해 놓고 본인도 똑같은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는 내로남불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치를 후지게 만드는 주범이다.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작동된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표와 수장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고 그 결과에 따라 유지 또는 교체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없고 현재 시행하고 있는 방식과 제도 또한 많은 문제와 모순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기존 방식을 따르는 게 순리다.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기존 방식의 흠만 계속 들추는 것은 억지나 다름없다. 선거 제도와 방식은 민주주의에서 다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므로 공정성, 안정성, 대표성, 일관성 등의 제반 원칙이 확고하게 견지돼야 한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70일도 안 남은 시점까지 전체 의석의 15% 이상(300석 중 47석)을 차지하는 비례대표 선출 방법이 결정되지 않았을뿐더러 어떤 식으로 낙착될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다면 사실상 결정권을 갖고 있는 압도적 다수당과 그 대표의 횡포이자 농단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4년 전에 무리하게 채택한 현행 비례대표 선출 방법이 모순은 있지만 더이상 논의할 시간이 없으니 한 번 더 시행하기로 하든지, 아니면 이전 방식으로 돌아가든지, 그도 아니라면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하든지 빨리 결정하는 것이 유권자에 대한 도리이자 책임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시시각각 변하는 선거 판세를 좇으며 어떻게든 자기들에게 가장 유리한 총선 결과가 나오게 하려고 잔머리를 굴리느라 나라의 뼈대에 속하는 국회의원 선출 방식과 제도를 선거일 임박 시점까지 일부러 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국정 농단이다. 이런 작태를 보고 사익을 위해 공익을 희생시키는 농간이 아니라고 반박할 정치인이나 정당이 당사자 본인들 말고 누가 있겠는가. 국회의원선거는 출마자와 정당들에는 정치적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제도이자 절차인데도 4·10 총선은 시합 규칙도 정하지 않은 채 시합 날짜가 임박하고 있는 운동경기 같은 신세가 됐다. 이제 와서 전 당원 투표에 부치고, 그렇다고 그 결과를 반드시 채택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가 결국은 이재명대표에게 정권을 부여한다니 도대체 뭘 하자는 꿍꿍이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불과 몇 년 전 현직 대통령과 집권당을 국정 농단으로 몰아 가혹하게 심판한 국민과 유권자들이라면 지금처럼 사익을 위해 공익을 도외시하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정당과 그 대표를 투표로 준엄하게 응징하고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과 유권자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