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갈쿠리로 개 잡듯이"…  1923년 9월1일 일어났던 관동대지진 당시 일제의 참혹한 만행이 우리 정부의 기록물을 통해 잇따라 밝혀지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우리 동포를 보호했다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의 말과 달리 당시 헌병들도 학살에 동참했다. 1953년 이승만 정부에서 작성한 `3·1 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 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 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 22만9781명) 등 23만여 명의 이름이 적힌 명부 67권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의뢰받아 직접 분석에 참여한 김도형 독립기념관연구소 연구위원은 뉴시스와 통화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들 명부는 지난 19일 공개돼 나라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받은 것이어서 향후 독립유공자 추가 선정은 물론 한일관계에도 큰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은 중요한 역사적 사료다. 지난 6월 일본 도쿄에 있는 주일한국대사관이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돼 국가기록원에 이관됐다. 자료 조사는 1952년 12월15일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다. 1952년 2월 제1차 한일회담 결렬 후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남한에 연고자가 있는 피살자들이 조사 대상이어서 전체 규모를 담은 것은 아니나 정부의 최초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의 경우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외에 3·1운동 피살자 명부와 징병자 명부에 중복 기재된 52명을 포함한 342명 중 실제 피살자는 198명으로 조사됐다. 나머지 144명은 잘못 기록됐거나 3·1운동 관계자, 독립운동 참가자 등으로 조사됐다. 김 위원이 밝힌 추가 내용을 보면 관동대지진 당시 동포들의 참혹한 학살 기록을 볼 수 있다. 전체 명부의 10%에만 학살 상황이 적혀있음에도 입에 올리기 힘들 만큼 처참하다. `쇠갈쿠리로 개잡듯이` 살해당한 경남 창녕 출신의 한용선(23)씨 외에도 울산이 고향인 박남필(39), 최상근(68)씨는 `곡괭이로 학살됐음`이라고 쓰여 있다. 이외에도 일본인이 죽창으로 배를 찔러 숨진 경남 함안 출신의 차학기(40)씨, 군중에 피습당해 사망한 경남 밀양 출신의 최덕용(26), 이덕술(22)씨 사례도 명부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그동안 일본 정부가 관동대지진 때 군인들이 한인 동포들을 보호했다며 학살사실을 부인했던 것과 달리 일본 헌병과 군인에게 총살당한 경우도 기록돼 관심을 끌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관동대지진 때 한인 동포들이 죽창과 곡괭이, 쇠갈퀴 등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명부에 또렷이 기록돼 있다"며 "특히 그동안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 한인들을 보호했다고 했던 일본 헌병도 총을 쏘며 학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정부 문서로 처음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 `3·1운동시 피살자 명부`를 현재의 3·1운동 독립유공자 명부와 비교한 결과 경기도·충청도 지역에서만 174명이 독립유공자로 새롭게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동안 3·1운동 피살자가 7000여명 가량이라고 언급해 왔었는데, 이번 명부로 200여명 가까이가 새롭게 독립 유공자로 포상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6·25 전쟁 이후 일제 때 피해당한 유공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가 한 번도 없었다. 전시였지만 1953년에 피해상황을 조사하려 노력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며 "해방 후 8년, 관동대지진 이후 30년이 지난 상황이었지만 당시 희생자 가족이나 직접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역사적 신빙성이 높은 자료인데다 우리 정부가 최초로 조사한 것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명부의 존재가 공개된 만큼 이 자료들을 관련기관에 보내 연구를 진행하고 유공자 선정을 위한 공훈자료로 써야 한다"며 "더 급한 것은 강제동원 명부에 5만5000여명이 새로 밝혀진 만큼 고령인 피해자들이 하루속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피살자 명부 최초 공개     일제 강점기 징용·학살피해자 23만 명의 명단이 공개됐다. 특히 3·1운동과 관동대지진 당시 피살자 명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최초의 기록이어서 관심이 집중된다. 또한 이들 명부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이 마무리되면 상당수의 징용·피살자가 추가로 확인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렇게 되면 독립유공자 선정에 결정적 자료로 활용되는 한편 과거사 증빙자료로서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원장 박경국)은 1953년 이승만 정부에서 작성한 `3·1 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 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 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 22만9781명) 등 총 67권을 수집해 분석한 결과를 19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한 기록물은 일본 도쿄에 있는 주일한국대사관이 지난 6월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을 국가기록원에 이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자료는 1952년 12월15일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내무부에서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작성한 명부로 확인됐다. 1952년 2월 제1차 한일회담 결렬 후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은 이번 자료를 수집한 이후 그동안 명부별 분석작업 및 외교부, 국가보훈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등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이번에 그 결과를 공개했다.  ◇3·1 운동 피살자명부 최초 공개…630명 담겨 `3·1 운동 피살자명부`는 1권 217매로 지역별로 모두 630명의 희생자가 실려 있다.  이 명부는 그 동안 국내외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최초의 피살자 명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3·1운동 당시 순국한 분 중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숫자는 현재까지 총 391명에 불과했다. 특히 지금까지 어떠한 명부도 발견되지 않아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명부에는 일부지역의 경우 읍·면 단위로 성명, 나이, 주소, 순국일시, 순국장소, 순국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향후 독립유공자 선정에 실질적으로 크게 도움이 될 전망이다.  명부를 토대로 일부 지역별로 분석한 결과 경기도는 모두 169명중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경우가 53명, 포상이 보류된 경우가 8명이었다. 하지만 이번 자료를 통해 전체 3분의 2인 100여명이 새롭게 확인됐다. 또한 10대 2명, 20대 34명, 30대 47명, 40대 45명, 50대 이상 41명(미상 4명 포함) 등 전 연령층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충청도는 모두 100명중 기존 31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고, 69명이 이번에 발굴된 자료를 통해 추가로 확인됐다. 당시 천안군의 경우 29명중 16명이, 예산군의 경우 10명중 7명이 새롭게 발견됐다. ◇관동대지진 당시 피살자 290명 명부 최초 공개 `일본진재시피살자명부`(1953)도 이번에 최초로 공개됐다. 이 명부는 1923년 9월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명부다. 1권 109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290명이 기록되어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피살자 수는 적게는 6000여명, 많게는 2만여 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명단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명부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자 이름 이외에 본적, 나이, 피살일시, 피살장소, 피살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명부에는 사망원인에 대해 일부가 "지진으로 사망"하거나 "경찰서 유치장 등에서 순국"한 것 등으로 되어 있다. 학살방식도 피살, 타살, 총살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남 합천군의 경우 이광○(26세), 이관○(26세), 이광○(17세), 이소○(2세) 등 일가족 4명이 모두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발견됐다. 그동안 관동대지진 관련 자료가 부족해 국내외 학술연구가 어려웠던 상황을 감안하면, 이번 명부 발견을 계기로 관련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제 징용자 명부 공개‥현존 최고(最古) 기록 추정 `일정시(日政時) 피징용(징병)자 명부`는 우리정부가 1953년 최초로 작성(총 65권 22만9781명)한 것으로, 피징용자명부 중 가장 오래된 원본기록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은 이번에 발견된 `일정시피징용자명부`외에도 우리정부가 작성한 `왜정시(倭政時) 피징용자 명부`(1957년 노동청 작성) 등을 보존하고 있다. 1957년본 `왜정시피징용자명부`에는 모두 28만5771명이 등재되어 있으나 이중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피징용(징병)자로 인정한 숫자는 약 16만 명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기존 명부는 생년월일과 주소 등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피해자로 바로 판정할 수가 없고 별도의 사실관계 확인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견된 `일정시 피징용(징병)자 명부`의 등재자수는 모두 22만9781명으로, 1957년도에 작성된 종전 명부보다 5만5990명이 적다. 하지만 종전 명부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생년월일, 주소 등이 포함되어 있어 피해자 보상심의를 위한 사실관계 확인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정시 피징용(징병)자 명부`중 일부 지역을 분석한 결과, 경북 경산지역의 경우 모두 4285명 중 1000여명이 종전 명부에 없는 신규 명단으로 밝혀졌다. 경북 경산지역의 예로 볼 때, 앞으로 징용자 명부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이 마무리되면 상당수의 징용자가 추가로 확인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번 명단과 관련해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3·1운동과 관동대지진 당시 피살자 명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분야 학술연구는 물론 과거사 증빙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이 명부가 정부수립 직후 우리 정부차원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작성했다는 사실도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일정시 피징용(징병)자 명부`는 6·25 전쟁 중 남한지역만을 대상으로 단기간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관련부처 및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사실 확인 및 검증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앞으로 이 자료를 국가보훈처 등 관련부서에 제공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과거사 증빙자료로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라며 "개인 명부별로 세부사항을 정리해 2014년 초부터 일반국민들이 열람할 수 있게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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