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재 / 언론인공동의 적(敵)이 사라지면 동맹도 와해된다. 새로운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주도권과 제한된 자원을 놓고 갈등을 빚는다. 동맹이 순식간에 적(敵)으로 바뀐다. 미국 전략사무국(OSS)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소련을 미국의 가장 큰 적으로 간주했다. OSS는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이다. OSS는 독일의 과학기술이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막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OSS는 `페이퍼클립(Paperclip) 작전`에 돌입했다. 목적은 독일 과학자의 영입이었다. 상당수 독일 과학자들은 나치당원 출신이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나치당원을 배제하라고 지시했지만 OSS는 이를 무시했다. OSS는 독일 과학자들의 경력 표백 작업에 돌입했다. 이들의 신분을 세탁했다. 나치 당원 가입 사실은 삭제했다. 이들은 새로운 신분을 얻은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페이퍼클립은 날조된 경력을 끼워 넣는 것을 의미했다. 로켓 개발의 아버지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세계적인 생리학자 위베르투스 스트럭홀트(Hubertus Strughold) 등 쟁쟁한 독일 과학자들이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이들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아폴로 계획을 비롯한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과학자뿐 아니라 상당수 전범들도 독일을 떠났다. 이들은 가톨릭과 미국의 비호아래 `쥐새끼 도주로(Rat Line)`를 이용했다. 새로운 신분증을 만든 후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에 정착했다. 리용의 인간 백정 `클라우스 바르비`도 그렇게 볼리비아로 이주했다. 바르비는 1942년 독일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 리용 지부장으로 취임한 후 1만4000명의 프랑스인과 유태인 학살을 주도했다. 그는 여성뿐 아니라 어린이들까지도 잔인하게 고문했다. 미군은 종전 후 바르비를 방첩부대 첩보원으로 고용했다. 그의 심문 기술을 반공(反共) 작전에 활용했다. 프랑스는 미국이 바르비를 보호하는 것을 확인한 후 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미국은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쥐새끼 도주로를 통해 바르비를 볼리비아로 빼돌렸다. 바르비는 유럽 공산당에 심어둔 스파이 조직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미국은 바르비를 프랑스에 넘기면 이런 정보를 폭로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바르비는 볼리비아에서 `클라우스 알트만`으로 이름을 바꾼 후 군(軍) 장교로 변신했다. 프랑스에서 쌓은 레지스탕스 적발 경험을 반(反)정부 인사 탄압에 써먹었다. 바르비는 쿠바 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를 체포하는 데도 기여했다. 숱한 독일 전범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중남미,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했다. 유태인 대량학살을 기획한 `아돌프 아이히만`,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주도한 `요제프 멩겔레` 등이 신분을 세탁한 후 유럽을 떠났다. 이렇게 도주한 독일 전범은 3만 명을 웃돌았다. 독일 전범들은 죽을 때까지 불안에 떨었다. 나치 사냥꾼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치사냥꾼이란 지구 끝까지 나치 전범을 추적한 유태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평생 나치 전범을 쫓아다녔다. 유태인 동포들이 활동비를 지원했다. 아이히만 체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이먼 비젠텔(Simon Wiesenthal), 투비아 프리드먼(Tuviah Friedman)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사이먼 비젠텔은 나치 전범을 `책상 앞의 살인자`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인간을 직접 살해한 게 아니라 `민족적 순결을 위협하는 적(敵)`을 처리하는 내용의 서류에 서명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지적처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었다. 유병언 일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 펄쩍 뛸지도 모른다. 한국선급 압수 수색 사실을 유출한 해양경찰은 그저 아는 사람에게 정보를 찔러줬을 뿐이다. 숱한 인명을 죽음으로 내몬 사업 덕분에 짭짤한 수익을 챙겼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현장이 아니라 책상 앞에서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책상 앞의 살인자`는 쉽게 적발되지도, 처벌되지도 않는다. 구조적인 악(惡)은 끈질긴 저항 앞에서 비로소 무릎을 꿇는다. 우리에게도 `나치 사냥꾼`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독려하며 장정(長征)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세월호를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