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안중근은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두 가지 비극에 직면한다. 을사늑약과 아버지의 사망이다. 안중근은 결심한다. ‘그때 나는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했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은 “안중근 장군은 15세 전후부터 술고래였다. 술 마시고 친구 사귀며 말 타고 총 쏘며 사냥을 즐기는 것을 삶의 모토로 생각한 분이다. 그런데 나라의 주권이 침탈당하자 가장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그리고 순국할 때까지 단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특기한다.일제 검찰관의 신문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나는 술과 아편을 하지 않는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안중근의 진술이다. 자기절제의 화신이 따로 없다.이순신은 뜻밖에도 음악 애호가다. ‘난중일기’에는 음악 관련 내용이 대략 19차례 등장한다. 처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개월 전이다. 일종의 무사놀이인 침렵치(沈獵雉)를 구경하고, 사기를 북돋우는 시를 읊고, 군관 모두 춤을 췄다는 기록이다. 최후는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돼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직후다. 홍근우와 이 별좌가 위로의 노래를 불렀지만 즐겁지 않았다고 한다. 이 원장은 “이순신 장군은 노래와 연주를 통해서 투혼을 불태웠다. 난중일기에는 피리·노래·거문고에 관한 기록이 각각 7·5·3번, 퉁소·가야금·풍악·아쟁에 관한 기록이 1번씩 나온다. 손수 시를 읊거나 피리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각 2번이고, 아쟁 관련 기록은 악기의 줄을 매었다는 내용”이라고 설명한다.이순신은 시인이기도 하다. ‘어느새 한산도에 가을빛 짙게 내려앉으니, 찬 기운에 놀란 기러기 저 높이 나는구나. 마음속 근심으로 잠 못 이뤄 지새우는 밤. 새벽달 창문 넘어 칼과 활을 비추누나.’ (‘한산도 밤의 노래’)풍부한 감수성이다. 이순신은 그러나 군신(軍神)이다. 긴 칼 2자루에 섬뜩한 글귀를 새긴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천이 떨고, 단칼로 모두 없애 피로 강산을 물들이리.’이 원장은 “둘을 합치면 나라사랑의 마음이 절절한 노래 가사가 된다. 이 노랫말에 멋진 선율을 붙이면 역사가 있는 군가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권한다. 그렇게 안중근과 이순신에게서 오늘날 ‘의식의 노래’가 나아갈 길을 본다. 애국가, 삼일절 노래, 현충일 노래,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한글날 노래 등이다.‘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정인보 작사·윤용하 작곡 ‘광복절 노래’)이 원장은 “기쁨과 감동이 넘치는 명곡이다. 우리 의식의 노래들 중에서 이 노래만큼 가사와 멜로디가 잘 어우러지는 곡을 찾기 힘들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 님 벗님 어찌하리’라는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구절, 즉 광복을 꼭 보고야 말겠다던 어른들과 벗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구절이 청중에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곡 해석이 빨리 나왔으면 한다”고 촉구한다. “합창보다는 독창이 돋보이는 해석이면 좋겠다. 또한 제작자와 연주자들이 사전에 일정한 기간 동안 관련 행사나 의식에 관해서 전문가의 강의를 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연주자들이 엄청난 연습을 하고난 후에 무대나 녹음에 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주문한다. 애국혼을 담은 절창의 출현을 청한다.“옛 성인은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데 우리가 국론통일, 나아가 민족통일을 하는 방법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특히 예악을 최대한 단순하게 자기절제의 정신함양과 의식의 노래의 생활화라고 해석하고 실천함으로써, 국론통일과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교황과 세월호에 묻혔지만, 어제는 제69주년 광복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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