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전 중국 황제를 바지저고리로 만들어 놓고 국정을 농단하다가 그 자신들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은 물론 나라까지 망하게 한 십상시(十常侍)가 전국적인 화두가 되어 있다.  십상시란 중국 후한 말 영제(156~189) 때 조정을 장악했던 환관 10여 명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영제는 무능하고 병약해 십상시의 말을 따라 수많은 충신들을 죽였다. 십상시는 그들을 거역하는 무리들은 가차 없이 처단하며 국사를 전횡했다. 심지어 황건적을 격파한 장수들에게도 뇌물을 바치라고 협박하였고 말을 듣지 않자 황제에게 “주전과 황보숭은 태수자격이 없습니다. 벼슬을 거두소서”하고 모함하만 그대로 했다. 뿐만 아니라 내시들을 제후에 봉하니 천하의 권세가 그들의 손안에 들어갔다. 장사에서 구성이란 자가, 여양에서 장거와 장순이 반란을 일으키고 천자니 대장군이라고 자칭하는 등 나라가 위태로운 상태인데도 십상시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다. 황제가 십상시와 후원에서 연회를 베풀고 술을 마시는데 간의대부 유도가 통곡하며 말했다. “폐하, 나라의 존망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게 위급하온데 내시와 어울려 잔치만 즐기시니 이를 슬퍼하여 통곡하나이다” “무어라고? 태평세월인데 어이하여 요망하게도 나라가 망한다 하는가?” “폐하, 지금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십상시가 매관매직을 일삼아 생겨난 일입니다. 그렇게 벼슬자리에 오른 탐관오리들이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있습니다. 민심은 이반되고 도적은 들끓고 산하가 초토화되었습니다. 폐하의 밝은 눈을 흐리게 한 내시들을 모두 쫓아내소서. 그들로 인하여 생긴 화가 이제 눈앞에 까지 이르렀나이다” 황제가 크게 놀라 어쩔 줄 모르는데 곁에 있던 십상시가 일제히 엎드려 고하기를 “폐하, 통촉하소서. 신들과 대신들이 뜻이 맞지 않어 이런 불미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대신들이 그와 같이 말하면 신들은 살길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시골로 내려가 밭이나 갈까 하오니 저희들의 재산은 모두 팔아서 군자금으로 사용하소서”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황제는 십상시에게 속은 줄도 모르고 유도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다. 유도는 울부짖으며 “내 한 몸 죽은 것은 애석하지 않으나 4백년 이 나라 사직이 망하려 하니 그것이 오로지 슬픈 일이로다”하며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 때 강직하기로 소문난 사도 진탐이 황제께 아뢰기를 “폐하는 무슨 연유로 유도의 목을 베라 하셨습니까?” “근신을 모독하고 짐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노기를 띠고 말했다. “천하의 백성들이 다 같이 십상시의 고기를 먹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폐하께서는 그들을 부모처럼 공경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십상시는 아무런 공도 없는데 제후에 봉했습니다. 봉서는 황건적과 결탁하여 역적질을 한 장본인이지만 제후에 봉했습니다. 폐하께서 이를 깨닫지 못하시면 머지않아 사직이 망할 것입니다” 황제는 그러나 “짐은 봉서가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은 바 없다. 그리고 공이 말한 것처럼 십상시 중에 어찌 한 두 명의 충신이 없단 말이냐?” 진탐이 머리를 댓돌에 들이 받자 황제는 “저 것들 두 놈을 다 옥에 가두어라” 그날 밤 십상시가 간의대부 유도와 사도 진탐을 죽였다. 그러나 얼마 뒤 십상시도 결국 주륙당하고 더불어 후한까지 멸망케 된다.  그 악명 높은 ‘십상시’가 박대통령의 국회의원시절 보좌관이었던 정윤회 씨 및 일부 청와대 전-현직 비서관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들의 농탕질은 개탄스러우나 ‘십상시’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날이 갈수록 확대되는 현 사태는 국치(國恥)로 불러야 마땅할 정도로 위기국면이다. 케이블티비에 정치평론가들이 몰려 나와 흥미중심으로 떠들고 있을 한가로운 상황은 아니다. 차욱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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