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 언론인
염수정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염 추기경은 축하행사에서 “뿔뿔이 흩어진 양들을 모으고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염 추기경의 이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 겨울 매서운 추위로 움츠러든 몸과 마음에 온기가 퍼졌다. “이렇게도 따뜻하고 다정하게 희망을 주는 말을 들어본지 얼마나 오랜만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코 심오하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아닌 “뿔뿔이 흩어진 양들을 모으겠다”는 염 추기경의 말이 이처럼 반갑고 고맙게 들리는 건 뿔뿔이 흩어진 지 너무 오래된 우리 모두가 너무나 외롭고 힘들어 지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지난 수십년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 결과, 어느 때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 그늘에는 아직도 세끼 밥을 제때 못 먹을 정도로 굶주리는 이웃이 있다. 부모 없이 자라야 하는 어린이들과 자식 얼굴을 못 보며 춥고 어두운 쪽방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노인들도 있다. 젊은이들은 취업난에 가로막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기는커녕 현실을 원망하며 가장들은 가족부양과 안정된 노후생활이라는 두 가지 숙제에 짓눌려 허덕인다.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된 삶을 살게 됐지만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진영논리와 이념갈등, 이익집단의 대립으로 사회는 갈래갈래 찢어진 지 오래다. 집단과 집단, 진영과 진영, 세력과 세력들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은 저주와 비난, 혐오와 경멸만이 가득하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의 갈등은 지역간, 정치세력간 갈등을 넘어 세대간, 계층간 갈등으로 확산되고 그 골은 더욱 깊어졌다.
염 추기경의 ‘흩어진 양들을 모으겠다’는 말은 그 단순명료함이 우리에게 훈훈한 온기를 넘어 희망을 준다. 거창한 개념이나 철학적 수사를 동원한 말일수록 공허하기 쉽고 실천력도 의심받는다. 그런 말들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지쳐있는 우리에게 염 추기경의 이 짧은 말 한마디는 오히려 믿음이 가고 의지가 된다. 오직 실천-그가 예수의 사랑이라고 말한-으로 우리 사회의, 어린 양들의 화합과 통합을 이끄는데 앞장서겠다는 의지와 각오가 이 짧은 말 속에 넘치고 넘친다. 오랜 세월 사목활동을 하면서 보여준 깊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과 이를 뒷받침해온 뛰어난 친화력과 추진력도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기대를 크게 한다.
그는 취임 소감에서 또 “저만 빼고 모두 즐거워하시는데 더욱 무겁고 두려운 마음”이라고도 말했다. 흩어진 양들을 모으는 일이 쉽지만 않음을 토로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히려 겸손이 무엇인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과 교만한 언동이 넘치는 요즘, 심지어는 천주교 안에서도 ‘내 탓이오’가 아니라 ‘네 탓이오’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정의를 앞세우며 사회 정치적 갈등에 기름 끼얹기를 주저하지 않는 요즘, 염 추기경의 겸손은 우리를 책임져 주려하는 중심 잡힌 어른이 있다는 안도와 함께 우리를 즐겁게 하고, 희망을 품게 한다.
여러 차례 이 칼럼을 통해 우리 사회에 오고가는 말의 거침과 소란함, 소통하자며 사실은 소통을 거부하는 불통의 말이 범람하는 것을 걱정하고 경계했다. 심지어는 ‘침묵은 여전히 금’이라며 말을 안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염 추기경의 말처럼 좋은 말, 선한 말, 진정이 담긴 말이라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말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