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 초 모스크바에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 소련 해체 1년여 전이고 한-소 수교 후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당시는 모스크바 출장이 매우 드문 편이었다. 7박8일짜리 여행을 앞두고 귀동냥으로 들은 출국준비물에는 라면, 물, 스타킹, 화장품, 미제 담배-정확히는 말보로 레드-등이 들어 있었다. 공산 치하는 첫걸음이라 그런지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가 한창인 모스크바는 활기차 보였고 취재에도 별 불편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이상한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상점 앞에 긴 줄이 있었다. 소비재 공급이 워낙 달려 물건 파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줄을 선다는 게 관광안내원의 설명이다. 우유든, 운동화든, 가전제품이든, 종류·가격 불문, 그래서 늘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때로는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고 줄부터 선단다. 실제로 백화점이나 마트는 매장이 텅 비다시피 했다. 그러니 갖고 간 물건들이 꽤 쓸모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스크바 시내 어디든 ‘빨간 뚜껑’ 말보로 한 갑이면 택시비가 해결됐다. 미리 식당을 예약해야 하는 현지 관행을 미처 몰랐던 우리에게 라면과 물은 요긴한 비상식이었고 스타킹 등이 더 없이 훌륭한 선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느닷없이 20년도 넘은 모스크바에서의 옛 경험담을 끄집어낸 건 요즘 우리 상황과 맞닿아 있는 듯해서다. 정치권과 경제계가 초과이익공유제 논란으로 시끄럽다. 단초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제공했다. 생산과정을 노동과 자본뿐 아니라 협력업체까지 확대한다면 초과이익의 일부를 협력업체에도 나눠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총리까지 지낸 분의 말씀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계는 물론이고 정부와 여권 내부에서도 ‘현실성 결여’를 들어 시큰둥해하는 분위기다.산업계와 직접 접점이 닿아 있는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부터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다. 초과이익공유제란 애초 기업 내에서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성과를 배분할 때 나오는 개념이지 기업 사이에 적용할 개념은 아니라는 게 최 장관의 논리다. 우선 원가 절감 등으로 이익이 났을 때 협력업체의 기여도를 어떻게 산정하느냐부터가 문제다. 예컨대 자동차는 부품납품업체가 1만 개도 넘는데 기여도를 하나하나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생산기지가 외국에도 있는 국내 기업이라면 초과이익을 어떻게 배분하나? 그리고 하면 다 하지 왜 상위 56개 기업만인가? 이들 기업은 그래도 협력이 잘되는 편이고 중견기업들이나 1, 2, 3차 협력업체들끼리가 더 문제 있는 것 아닌가? 혹시 자본주의의 근간인 사유권을 부정하는 요소는 없나? 초과이익을 숨기려는 시도가 지능적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이뤄질 텐데 행정력이 따라갈 수 있나? 삼성전자는 최대 납품처인 애플의 초과이익을 공유할 수 있나? 초과이익이 과연 생겼는지, 생겼다면 얼마인지를 가늠할 수 있나? 개념부터 모호한 구석이 많은 초과이익을 둘러싸고 의문이 꼬리를 문다.지난해처럼 일부 대기업은 수출 호조 등에 힘입어 몇 조 원씩 챙기는 사상 초유의 호황을 누리지만 협력업체들은 갈수록 더 허덕이니 대기업이 도와서 중소기업의 이익구조도 개선하고 기술 개발 여력도 갖추게 하자는 충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래야 국가경쟁력이 올라가고 다 같이 잘살게 된다는 매우 훌륭한 구상이다. 이명박 정부도 임기 후반 국정의 최대 화두로 ‘동반 성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함께 성장하자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그러나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꽤 진부한 명제다. 가난한 사람 도와주려고 부자의 사유재산을 빼앗아선 안 된다는 얘기다. 혹시 대중은 ‘의적’으로 칭송할지 몰라도 국가가 나서서 법을 어기고 사유권을 부정하라고 부추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 위원장은 강제 조치가 아니라 초과이익 배분 규모와 대상 기업을 대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 시행하면 세제나 공공기관 수주 등에서 혜택을 주자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율’로 포장해 봤자 곧이 곧대로 믿기지 않는 건 사실이다. 세종시 때의 올곧은 집념에 대한 존경심이 몽땅 날아가는 느낌이다.‘현대 공산주의의 아버지’ 카를 마르크스는 1875년 저서 ‘고타강령 비판(Critique of the Gotha Program)’에서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배분받는다(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고 외쳤다.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념을 현실로 옮긴 공산주의 소련의 처참한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정 위원장의 초과이익공유론을 듣고 모스크바가 떠올랐다면 순전히 과민반응 탓일까?필자도 대기업의 횡포에는 누구 못지않게 분개한다. 에버랜드나 글로비스 사건 같은 재벌의 범죄행위는 부당이익 환수뿐 아니라 총수와 일가족을 직접 처벌하는 일벌백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뺏어서 주는 건 안 된다. 손목 비틀기 식의 강제는 면종복배(面從腹背)만 유발할 뿐이므로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자면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동반 성장에 나서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공정거래법이나 하도급법 등 관련 법규도 엄격히 시행해야 하지만 대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상상도 못할 사회적 제재를 집중시키는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그래야 비로소 사이좋게 함께 갈 수 있다.세계는 지금 사상 최악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폭발에 이은 방사능 누출로 절체절명의 국난에 처해 있는 일본을 돕기 위해 앞다퉈 지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불가항력인 자연재해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일본 국민의 위대함도 그렇지만 사이좋게 함께 가는 세계의 모습이 아름답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꽃샘추위가 겁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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