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대구고법에서 열린 ‘대구 여대생 정은희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정양을 집단 성폭행한 뒤 사망에 이르게 한 범인으로 지목돼 왔던 스리랑카인 K(48)씨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도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이날 재판을 맡은 대구고법 제1형사부(부장판사 이범균)는 “K씨가 공범들과 정양을 단독 또는 집단 성폭행했을 가능성은 인정되나 강간죄의 공소시효는 ‘10년’이므로 이미 사건의 시효가 만료됐다”라고 밝혔다.◇‘대구 여대생 정은희 사건’은1998년 10월17일 오전 5시30분 학교 축제를 끝내고 귀가하던 여대생 정은희(당시 18세)양이 대구시 달서구 구마고속도로에서 23t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단순 교통사망사고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은 15년이 넘도록 명확한 윤곽이 드러나지 않다가 당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정양의 속옷에 묻은 정액의 DNA 일치자가 나오면서 2013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DNA 일치자는 성매매 등 혐의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K씨였다.같은해 9월 검찰은 K씨를 특수강도강간죄로 구속기소했다. 사건 당시 K씨와 스리랑카인 동료 2명이 술에 취한 채 귀가 중이던 정양을 구마고속도로 인근으로 데려가 집단 성폭행한 뒤 금품을 훔치고 정양을 현장에 버려둔 채 달아났다는 것이다. 공범인 2명은 2001년과 2005년에 각각 귀국한 상태다.그러나 지난해 1심에서 재판부는 특수강도 범행에 대한 증거불충분과 강간의 범행이 일부 인정되더라도 해당 공소시효가 10년으로 만기됐다는 이유로 K씨에 대해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면소’를 선고했다.◇‘강간’이 아닌‘특수강도강간’인정 실패… 무엇이 부족했나이 사건이 공소제기된 시점이 사건 발생으로부터 이미 10년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법적 처벌이 이뤄지려면 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 혐의가 인정돼야 했다. 그러나 원심과 마찬가지로 항소심에서도 K씨의 해당 혐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재판부는 이 점에 대해 “K씨의 특수강도강간 혐의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K씨가 정양의 물건 등을 훔쳤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나 정양의 물건이 교통사고 사망 현장에서 그대로 발견된 점, 사고 현장에 목격자가 있었고 경찰이 비교적 신속하게 출동해 K씨가 훔친 물건을 놔두기 위해 현장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없는 점 등을 종합하면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이어 새로이 등장한 이 사건 유력 증인의 사건 증언에 대해서도 “해당 증인은 수사기관 진술을 시작한 지난 3월로부터 16년 전인 1998년 겨울 K씨의 공범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는데, 비록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16년이 지난 현재까지 세세하게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유력 증인’스리랑카인 A씨의 증언“신빙성 떨어져”1심 선고 후 곧바로 항소한 검찰은 국내에 체류 중인 모든 스리랑카인들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벌였다. 이를 통해 K씨의 범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또 다른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A씨가 핵심 증인으로 채택됐다.A씨는 K씨의 공범 중 한 명으로부터 범행 과정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검찰은 이를 바탕으로 지난 6월 K씨에 대해 무기징역과 30년 간의 위치추적장치 부착명령을 구형했다. 1심에서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사건의 간접·정황증거를 보완하기에 충분할만큼 세밀한 증언이었다는 이유였다.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K씨의 공범이 우연히 같은 자리에서 만난 A씨에게 이렇게 중대한 사건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설명했을 것이라고 선뜻 믿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A씨의 증언에 따르면 1999년 겨울 무렵 A씨와 K씨의 공범은 스리랑카 산업연수생 10여명이 모인 술자리에서 만났다. 공범은 A씨에게 10-15분에 걸쳐 자신과 K씨가 정양을 순차로 성폭행한 뒤 정양이 도주하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양이 고속도로 쪽으로 도주했으며, 이어서 큰 차가 멈추는 소리와 사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정양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도 언급했다.A씨는 당시 정양의 옷차림, 정양이 소지하고 있던 물건, 성폭행 당시 K씨와 공범의 행동 등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기억해 증언했다. 그러나 수사기관 진술에서 “(정양이)사건 당시 치마를 입고 있었다”고 진술했다가 검사가 “정양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하자 진술을 뒤바꾼 점에서 신빙성을 의심받았다.A씨는 또 K씨가 정양을 성폭행한 뒤 가방을 뒤지다가 학생증을 보고 정양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에 겁을 먹어 도주하는 정양을 그대로 내버려뒀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실제 정양의 가방 등 소지품은 사망 현장인 고속도로 위에서 발견됐다. 당시 현장에는 목격자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있었으므로 K씨가 훔친 물건을 현장에 두고 갔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재판부는 “K씨의 변호인이 A씨의 증언 녹취록 일부에 대해서는 동의해 그 증거 능력은 인정되나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밝혔다.원 진술자가 사망하거나 질병, 소재 불명 등으로 법정 진술을 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한 ‘특신상태(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태)’가 인정되면 그 진술의 신빙성을 입증할 수 있다. 즉, 이번 사건처럼 원 진술자가 제3자에게 한 증언의 신빙성을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신뢰할만한 정황이 있어야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재판부는 증인이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각각 다르게 진술한 점, 1심에서 나온 법정 진술과 모순된 부분이 있는 점 등을 종합해 K씨의 혐의를 입증하기에 부족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한편 이날 재판에 참석한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68)씨는 재판이 끝난 뒤 “스리랑카인이 아니라 진범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때문에 또 다시 무죄가 날 것을 예상했다”면서 법원과 검찰에 강한 불신감을 내보였다. 검찰은 상고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대구 정은희 사건일지△1988년 10월17일 오전 5시30분 학교 축제를 마치고 귀가하던 여대생 정은희(당시 18세)양이 대구시 달서구 구마고속도로에서 23t 덤프트럭에 치여 숨짐. 같은 날 오후 1시30분 사고현장 인근에서 정양의 속옷이 발견됨. △1998년 12월21일 경찰, 교통사고 트럭 운전자에게 ‘혐의없음’ 처분 후 단순 교통사망사고로 사건 종결. 유족, 검찰에 재조사 진정 △1999년 3월 경찰, 정양 속옷 국과수에 감정 의뢰. 감정 결과 정액 검출 △2000년 9월 유족, 수사 경찰관 직무유기로 고소했으나 각하 △2013년 5월31일 유족, 대구지검에 고소장 제출 △2013년 6월5일 검찰, 국과수가 보관하던 정양 속옷의 정액과 스리랑카인 K씨의 DNA 일치 사실 확인 △2013년 9월3일 검찰, 스리랑카인 K씨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기소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국민고충 해결한 대표 사례… 15년 만에 유족 한 풀어줬다” △2014년 5월30일 대구지법, 피고 K씨에게 특수강도강간, 강도강간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 및 공소시효 만료 등으로 무죄(면소) 선고. 무면허운전 및 강제추행 혐의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 선고. 검찰 및 피고 모두 항소 △2014년 9월4일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 “항소심 공소유지 만전을 기할 것” △2015년 3월 검찰, 스리랑카인 핵심 증인 확보 △2015년 8월11일 대구고법, 항소심서도 특수강도강간 혐의 ‘증거불충분’ 무죄 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