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그저 시간만 볼 수 있으면 족했다. 하루 몇 번씩 태엽을 감아야 하는 시계를 차고 다녔는가 하면 5분이나 10분정도 틀리게 갈 만큼 정확성도 대충 대충이었다. 심지어 하루 두 번 맞는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차고 다니기도 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혼인을 치르면서야 이름 있는 시계를 예물로 받아 평생 차고 다닐 만큼 애지중지했다. 또 한동안은 대통령 이름이 박힌 시계를 자랑스럽게 차고 다니기도 했다.시계가 인류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15세기로 스프링의 탄성을 이용한 아주 초보적인 형태였다고 한다. 그 후 꾸준히 개발돼 왔으나 1900년대 초반까지도 남성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당시 유행하던 시계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포켓형으로서 신사의 품격을 높이는 소도구이기도 했다. 손목시계가 등장했으나 일부 여성들이 이용했을 뿐 그다지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의 도시와 교회 등에선 시계는 권위와 위용의 상징이었다. 청사나 성당 꼭대기에 대형 시계를 걸어놓고 시간에 맞춰 종을 치는 건 경건한 의례의 하나였다. 자연스레 도시와 성당 간 멋있고 큰 시계를 구하려는 경쟁은 치열했다. 시계는 애초부터 시간을 알려주는 지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계를 일반용으로 보급시킨 사람은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다. 1541년 제네바 시장으로 당선된 칼뱅은 당시 제네바에 모여 있던 위그노파 금속 세공업자들에게 회중시계 등 각종 시계를 만들도록 권유했다. 시계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제네바에 몰려들었다. 1780년 당시 제네바 수공업조합(길드)에 등록된 장인들만 5만명에 달했다. 흥선 대원군도 회중시계를 사용했다. 제27대 조선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역시 회중시계를 사용했다. 사용하던 회중시계의 제조사는 바쉐론 콘스탄틴. 출처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모 경매회사를 통해 출품됐으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개인 수집가에게 1억2500만원에 낙찰됐다고 한다.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시계의 무한경쟁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전장에서 일부 군인들이 포켓형 시계에 끈을 달아 손목에 감고 다니면서 손목시계의 실용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원거리에 떨어져 있는 병사들 간에 시간을 맞춰 동시에 포를 쏘는 데도 시계가 한 역할 했다고 한다. 휴대폰을 거쳐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면서 손목에서 사라지는듯하던 시계 산업이 사업의 돌파구를 찾아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이제 시계는 몇 개씩 지니며 옷차림에 따라 맞춰 차는 패션의 일부가 되고 있는가 하면 고가의 명품 시계는 부를 과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2012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고속도로에서 36명이 숨지는 교통사고가 발생하면서 성 고위관리가 사고 현장을 돌아보는 장면이 보도됐다. 그런데 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가 네티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네티즌들이 뒷조사를 벌여 관리가 수시로 시계를 바꿔 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같이 수천만원 하는 스위스 명품 시계였다. 네티즌이 ‘시계 형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뇌물시계를 자랑하던 시계 형님은 이듬해 뇌물 수수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박기춘 의원의 명품 시계사랑은 너무나 유별났다. 박 의원과 가족이 분양 대행업자에게 받았다는 금품 목록에 해리윈스턴·위블로·브라이틀링 같은 3000-4000만원짜리 시계가 무려 11개나 됐다. 아들 결혼 축의금 1억원을 비롯해 현금 2억7000만원, 1000만원하는 안마의자, 루이뷔통 가방도 받았다. 국회의원이 과연 좋긴 좋은 자리다.박 의원은 2012년 12월 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에 선출돼 2013년 5월까지 역임했고 2014년 6월부터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원내대표 취임 당시 “민주당을 뼛속까지 바꾸겠다”고 해놓고 뒤로는 검은돈을 챙겼다. ‘뇌물을 탐하는 마음이 심하면 반드시 심한 멸망을 가져온다’ 명심보감에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