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초겨울. 꼭 이맘때로 기억한다. 제14대 대선 선거운동이 막바지로 치달을 당시다.올해 처럼 때이른 추위가 들이 닥쳤다. 기자 초년병이었던 필자도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때였지 싶다. 갑자기 대선 유세현장 취재에 투입한다는 데스크 지시가 내려왔다. 얼마후 부산 사직야구장으로 달려갔다. 故 정주영 회장의 대선 유세 현장이었다. 서울 아시안게임 야구 예선전을 위해1986년도에 완공된 이 곳에서 정치유세가 열린 건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2만8000명 수용규모의 야구장에 족히 3만명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주영은 구름인파를 발아래에 두고 ‘헬기’를 탄 채 등장했다. 초겨울 매서운 바람과 함께 헬기에서 내뿜는 프로펠러 폭풍이 장관이었다. 이후 정주영은 헬기 유세 투어를 계속했다. 필자도 몇몇 유세현장을 좇아 다녀야 했다. 초보 기자의 눈에 비친 정주영의 모습은 ‘기인’이었다. 1960년대 정주영이 울산에 현대중공업을 세울때다. 500원짜리 지폐 한장으로 영국 바클레이 은행으로 부터 차관을 들여온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70년대말 국산 최초의 승용차 ‘포니’를 개발, 한국 자동차 산업의 혁명을 이끈 평가는 여전하다. 이 시기에 어린시절을 보낸 필자로선 정주영이 ‘최고의 기업인’으로 굳어 있다. 유세현장에서 대선 후보 정주영은 기발한 공약들을 발표했다. 반값 아파트, 국민학교·중학교 전면 무상급식 등은 유독 주목을 받았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 입학정원 폐지,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등도 기억에 남는 공약들이다. 반값아파트와 무상급식 등은 노무현정부 이후 실제 도입된 정책들이지만 당시로선 최근의 ‘허경영식 공약’처럼 평가절하됐다.정주영은 1992 대선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와 경쟁을 벌였다. 선거 결과 정주영은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YS, DJ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이후 그는 1993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대선이후 현대가(家)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주력 기업들이 잇달아 검찰 수사를 받았다. 현대그룹이 재계에 차지하는 영향력도 급속하게 감소했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거두 정주영의 이름도 퇴조하기 시작했다. 2001년 정주영이 타계한지 올해 14년이 지났지만, 그 동안 소떼를 몰고 방북길에 오르는 장면 외에는 사람들 기억에 별로 없다. YS는 1992년 대선 이후 정주영과 내내 불편한 관계였다. 그러다 2001년 정주영이 타계한 뒤 빈소를 찾아 조문하며 ‘사후 화해’하기도 했다. 지난주 우리나라는 YS 추모열기에 휩싸였다. 국민들 대다수가 한번쯤은 그를 되돌아봤다. 같은 시기, 고 정주영회장의 탄생 100주기를 보냈다.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 통천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올해 꼭 100세가 된다.YS 서거 이후 조사가 흥미롭다. 국민들의 YS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올랐다는 내용이다. 재평가를 통해 그는 ‘성공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 역대 대통령 중 유일무이하게 퇴임 후 별다른 ‘비리잡음’이 없었다는 점이 뒤늦게 반영된 탓인 것 같다. YS는 재임중 공과(功過)가 극명하게 엇갈린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하나회 숙청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금융실명제 실시 등은 대표적 공이다. 반면 정권 말의 노동법 날치기와 IMF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은 큰 과오로 남았다. YS도 퇴임 후 17년 동안은 정주영 처럼 잊혀진 사람이었다. 서거 이후에야 비로소 그를 재평가하며 ‘YS신드롬’이 나오기 시작했다. 1992년 초겨울은 YS와 정주영의 등장과 퇴장이 엇갈린다. 23년이 지난 2015년 초겨울에도 둘은 또다시 엇갈렸다. 성공한 대통령 서거에 가려진 대한민국 최고 기업가의 탄생 100주년.‘성공한 대통령은 국민이 만들고, 훌륭한 기업인은 스스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