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문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느니’라고 한 송나라 시인 도연명의 말처럼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을미년(乙未年) 양의 해를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간 것이 어제일 같은데 어느새 뉘엿뉘엿 서산머리에 걸터앉아 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가 그의 묘비에 떨어놓은 마지막 익살이지만 정말 해 놓은 것 없이 한 해가 후딱 지나고 보니 ‘내 이럴 줄 알았다’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버나드 쇼는 건방지고 불손하며 항상 자기 과시적인 일면이 있었다고 하지만, 반면에 젊은 날의 역경을 딛고 언제나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삶을 산 성공한 인물이다. 그래서 세상 인연의 끈을 놓을 때조차도 생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을 타고난 예리하고 쾌활한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묘비 위에 남겨 놓음으로써, 그의 범상치 않은 천재성과 품격을 지닌 통쾌한 해학을 세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 위대한 극작가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매년 거창한 계획으로 한 해를 시작하지만 세밑이 되면 보잘 것 없는 결말에 허탈해 한다. 결단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야무지게 하지 못하고 매사 우물쭈물한 탓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해가 저무는 데 있지 않고 ‘흐리멍덩한 마음’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어 잊어야 할 일이 그렇게 많다는 것인지 모임까지 만들어 부어라 마셔라 하며 야단스레 망년회를 한다. 그것도 한 달 내내.물론 근래 망년회(忘年會)가 일본에 유래한 것이라 하여 송년회(送年會)로 바꿔 부르고 있으나 속살까지 바뀌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1400여 년 전부터 12월이 되면 평소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한해의 괴로웠던 일, 슬펐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자”는 뜻으로 회식을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를 가리켜 ‘보우넹카이’라고 했고 그것이 오늘 날 망년회의 유래가 됐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망년회 문화의 그릇된 모습이다. 지난 1년간 하루하루 힘겹게 지나 온 것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새해를 준비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단지 취하기 위해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을 맺는 ‘술판망년회’,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노래방 단란주점으로 옮겨 다니며 혼절할 때까지 술판을 벌이면서 경제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으니 망국적 풍조라 하겠다.이처럼 비뚤어진 음주문화의 폐습이 사회문제화 되자 심각성을 인식했음인지 송년회 풍경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들린다. 경기 침체에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인원까지 감축하자 연말 분위기가 썰렁하다. 적자 폭이 큰 기업들이 임원을 대폭 줄이고 연봉마저 반납하는 상황이니 그럴 만 하다. 흑자기업도 잔뜩 힘든 시기여서 송년회는 꿈도 꾸기 어렵다는 말이 들린다. 그래서인지 송년 모임을 나눔과 봉사활동으로 대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주요 백화점과 대형마트들은 자선모금 활동을 하거나 저소득층에게 연탄·운동화 등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모임 형태를 바꾸고 있다. 이랜드그룹의 경우는 김밥 송년회로 종무식을 대신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창업 초기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 현장에서 만들어 먹었던 김밥을 통해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라고 하니 될성부른 나무다.송년회를 하더라도 1차로 간단하게 끝내기로 하는 등 예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 보인다. 잡코리아의 조사 결과 올해 송년회는 ‘1차로 간단히 혹은 낮에 만나는 등 조용히 보낼 것’이라는 응답이 65.9%로 ‘2차 이상’(34.1%)이라는 답변보다 훨씬 높았다. 횟수도 ‘작년보다 더 적게 참석하거나 비슷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답변이 80%를 넘었고 비용도 작년과 비슷거나(49.1%) 더 적게 사용할 것(32.6%)이라는 답변이 81.7%로 압도적이라고 한다. 망년회(忘年會)가 망년회(望年會)로 바뀌는 징조로 보이니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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