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어떻게 태어났나?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가물가물해지자 주시경 선생은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길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며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국가보훈처 블로그)는 신념으로 당시 언문, 가갸글, 조선글 등으로 불리던 우리 글자를 24자로 정리해 ‘한글’이라 명명하고 서울의 학교 20여 곳에서 가르쳤습니다.
보훈처는 그를 ‘한글 사랑으로 민족을 구한 독립운동가’로 받들고 있습니다. 그의 열정에 하늘도 감복했는지 일제가 한글을 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 교과과목에 포함시켰고 전국의 모든 학생이 배우게 됐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결국 총독부의 탄압을 받게 됐고 한글 사전을 만들던 선각자들은 ‘내란죄’로 체포돼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2명은 옥사, 조선어학회 사건).
이렇게 민족혼을 살려낸 한글은 해방 후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아가 세계 유수의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몫을 해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앞으로도 우리가 세계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데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모든 것이 노심초사 훈민정음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한글을 살려내신 주시경 선생의 공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글이 태어난 배경과 목적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기해 누구나 쉽게 생각을 글자로 표현하게 하는 게 목적이고, 한글은 우리 민족혼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훈민정음이 세계적이고 공격적이었다면, 한글은 우리만 생각한 지극히 이기적이고 수비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결코 부끄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나라를 잃고 낙담에 빠진 우리 조상들이 한글 운동으로 투옥돼 온갖 고초를 겪은 것만 봐도 민족의 생존을 위한 한글의 공로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과 당시의 한글운동가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려 마땅합니다.
▣한글과 훈민정음은 기능도 다르다
한글과 훈민정음은 태어난 배경이 다르므로 기능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8자를 24자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합용병서의 길을 막는 결과가 돼 버렸습니다.
합용병서란 마치 과학에서 원료를 혼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듯이 필요하면 자모를 조합해 새로운 발음을 표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입술소리 ㅁ, ㅂ, ㅍ, ㅃ은 원래보다 가벼운 발음을 만들기 위해 ㅇ을 아래에 연서(連書)해 입술가벼운소리 ㅱ, ㅸ, ㆄ, ㅹ을 만들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말에 쓰인 것은 ㅸ뿐이고 나머지는 중국어 등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훈민정음해례를 뒤적여 보면 두ᇢ이나 ᄢᅳᆷ 같은 글자들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글자들은 어떻게 발음하는지 지금은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는 쓰였던 것들입니다.
▣한글의 폐쇄성과 그 영향
이러한 사연으로 한글은 기본 24자에 겹자음 16자와 복모음 11자를 합한 51개 자모만 법으로 인정하고 그 밖의 글자는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재론하건대 기본 자모를 24자로 축소한 것보다 이렇게 자모의 조합을 불허한 규정이 한글의 발음표기 기능을 더욱 심하게 제약하고 있습니다.
51개 자모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본자음 :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14)
겹자음 : ㄲㄸㅃㅆㅉ(5)
겹받침 : ㄱㅅ ㄴㅈ ㄴㅎ ㄹㄱ ㄹㅁ ㄹㅂ ㄹㅅ ㄹㅌ ㄹㅎ ㅂㅅ (11)
기본모음 :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10)
겹모음 : ㅐㅒㅔㅖㅘㅙㅚㅝㅞㅟㅢ(11)
이 결과, 영어의 f 발음을 ㆄ나 ㅇㅍ 으로 표기하지 못하고 p와 함께 ㅍ으로 쓰는 바람에 두 발음을 구별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것 말고도 ㅸ(v)와 ㄹㄹ (l)은 당장 필요한 표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한글 세계화의 표본으로 삼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의 한글 사용도 이러한 합자(合字)를 쓸 수 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 ‘대한민국의 한글’로 거듭나야
한글은 훈민정음을 기본으로 깔고 있어 문자로서의 우수한 골격은 갖췄지만, 나라를 잃는 어려운 환경에서 거의 주시경 일개인의 노력으로 황급히 만들어졌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한류는 세계 각지로 무섭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훈민정음의 골격뿐만 아니라 유전인자까지 되살려 한글을 우리의 국격에 어울리고 미래의 발전과 함께 나갈 ‘대한민국의 문자’로 발전시켜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의 ‘대’가 ‘큰 대(大) 자’임을 되새겨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