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다. 화원삼거리에서 천내교 쪽 경사진 길을 걷고 있는데 너무 덥다. 대구 날씨는 날마다 전국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 폭염이 이글대던 그날 오후, 참말이지 숨막히게 더웠다. 메르스 탓인지 찜통더위 탓인지 길을 걷는 사람은 나와 또 한 사람 뿐이다. 10미터쯤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듬직한 체구며 성큼성큼 걷는 품이 이 정도 더위쯤이야 하는 것 같다. ‘좋은 몸이네’하며 따라 가는데 사내의 한 손이 앞가슴 쪽으로 돌아간다. 느낌이 왔다. 담배. 예감이 맞았다. 담배곽을 꺼내어 담배 한 꼬치를 뽑아 물더니 주변에 누가 있나 살펴보지도 않고 이번에는 라이터를 꺼내어 켠다. 하얀 연기와 함께 짙은 담배냄새가 바람을 타고 폭포처럼 밀려온다. 숨이 탁 막힌다.나는 어느새 뛰고 있다. 10여 미터 앞의 사내를 따라잡자 불문곡직하고 어깨를 탁 쳤다. “여보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었다. “뒤에 누가 있나 보고 담배를 피워야지. 담배연기 다 덮어쓰질 않소. 날씨도 더운데!” 상대방이 놀라 쳐다본다. “틀렸소?” 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도 놀랐다. 사내가 움찔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 싸우겠다. 곁에서니 나 보다 몇 센티미터는 클 것 같다. 여기서 처신을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오늘 운수 사납게 된다.갑자기 당한 일에 멀뚱해져 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다리를 건너는데 뒤따라오는지 옆길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구두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들리는 것 같기도 한데 돌아보기는 그렇다. 따라오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영감탱이가 오늘 혼 좀 나 보려고 작정했나’하며 주먹을 쥐고 달려 들 준비를 하고 있지나 않을까. 문득 며칠 전 사건이 생각났다.10대 청년이 새벽 운동을 나온 60대 노인을 수십분간 무차별 폭행했다. 지나다가 어깨를 부딪친게 죄였다. 청년이 노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한번 두 번 세 번… 골목길에 차가 들어서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얼른 건물로 숨었다가 차가 사라지자 곧바로 노인을 뒤쫓아 가 발길질을 다시 시작했다. 노인이 제발 때리지 말라고 두 손으로 빌었건만 갈빗대가 부러지도록 폭행한 치가 떨리는 그 사건. 머리속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의문의 사내가 뒤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텝마저 꼬일 것 같다. 만약 “좀 봅시다.”하고 말하면 어쩌지. 주먹이 날아온다면…. 화원연세병원을 지나고 주유소를 지났다. 아득한 사막을 건너는 기분이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뒤 돌아 보았다. 이런 없었다. 어깨의 힘이 풀렸다. 허 헛, 참. 예의 바른 사람을 만났네. 하마터면…. 아파트를 한 바퀴 돌면서 생각했다. 아니 반성했다. 제발 이제는 앞만 보고 살자. 후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마주 오는 사람이 있다. 혹시, 눈이 번쩍 뜨였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어르신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저도 이 아파트에 삽니다.” “아니 뭘, 내가 너무 과하진 않았는가.” 그러고 헤어졌다. 내 이 버릇 고쳐야지. 이게 어디 한 두 번인가.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으슥한 곳에서 수시로 내 목소리가 벼락치듯 했다. 중‧고등학생들이 떼거리로 몰려 와 산책로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어디서 온 젊은이들인지 주민들도 개의치 않고 애무에 정신없는 것을 못 본 척 하지 않았다. 고함쳐 내쫓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멱살을 잡을 듯이 으름장을 놓아 간을 뺐다. 그때마다 아내가 나를 제지했지만 들을 내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착해서 별 탈 없었는데 나는 아직도 힘이 넘쳐나는 중년으로 착각했다. 뒤숭숭한 세상이니 아무래도 운동을 해야 할 것 같다. 젊어서 손 놓은 태권도를 시작할까 검도를 할까 아니면 태극권으로 할까 생각하다가 아내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그 성질에 운동까지 했다가 무슨 일 내려고. 자기 성격이 얼마나 과한지 알기나 해요. 이제 그만 못 본 척 한 눈 감고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