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즈늑한 山寺,  하늘아래 맑디 맑은 이곳이 극락인가 *  청정지역 청도에 여승들만 모여 사는 사찰이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운문사는 그 모양이 연꽃 같다고 해서 흔히 연꽃송이에 비유되기도 한다. 지형적인 아름다움도 크지만 절 마당 곳곳에서 여승들의 맑은 음성과 미소를 만날 때면 연꽃 속에 머물고 있는 기분도 느끼게 하는 곳이 바로 이 사찰의 특이한 점이다. 봄의 문턱에서 산사를 즐겨 찾는 어느 문인은 "산을 애워 싼 구름이 하늘문을 여니 여기가 바로 극락이구나 싶다"고 표현한 곳이 바로 운문사다.  맑디 맑은 이곳에서 마음속 잡티를 말끔히 쓸어내 보자.  -편집자 주 _               *** 부처님 앞에 엎드려 세속의 모든 번뇌를 씻다***  - 운문사 내력 운문사는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 운문사사적기에 의하면 진흥왕 18년(557)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 후 신라 진평왕이 22년(600) 원광국사가 중창했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태조20년(937) 보양국사를 대작갑사에 주석케하고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선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고려 숙종 10년(1105)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가 인조7년(1129)부터 이 절에 머물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일연선사는 1277년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에 착수했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현종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최고에 이르렀다. 그 후, 제5중장추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고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ㆍ내원암ㆍ북대암 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고, 1842년 금당을 중건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현재 약 26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처진소나무를 비롯 30여 동의 건물과 7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 영정 및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불교정화 후인 1958년에 비구니전문강원을 개설,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였고 지금도 경학을 연구하는 승가학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문사에는 많은 암자와 이적들이 남아 있다. 암자는 사리암은 운문사 남쪽 10리 지점 산중허리에 있는 사리굴에 있으며 보양국사가 초창했다.  청신암은 운문사 입구 산기슭에 자리하고 이조말에 최현화화상이, 내원암은 운문사 동쪽 골짜기에 자리하고 원응국사가 초창하고  북대암은 신승이 소암으로 초창하고 원광, 보양, 원응국사가 중창했다. 4굴은 동쪽에 사리굴, 서쪽에 화방굴, 남쪽에 원앙굴, 북쪽에 묵방굴이고 4비는 신도비(원응국사비),행적비(일연법사의 비 인데 임진왜란에 없어졌다), 노비비(지금 없어졌음), 전답비(원응국사때 왕이 노비 토지에 대한 비인데 임란 때 없어졌다),  사액비(보양국사때 세운 것으로 임란 때 없어졌다)등이 있었다.  호거대는 절 서쪽산 기슭에 있으며 바위의 모습이 범이 앉은 모습이고 지리학설상이 운문산의 요지가 되고 호거산의 유래에도 연유된다.   경내에는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어 찬란한 운문사의 역사를 말해준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청동호, 금당앞 석등,석조여래좌상, 사천왕석주, 원응국사비  지정 문화재로는 삼층석탑, 천연기념물로는 처진 소나무가 있고 내원암 가는 길목에 10여기의 부도가 즐비하고  유명한 효종과 조영당에 안치한 역대 고승, 대덕의 초상화 10여폭이 있다.  현존건물은 대웅보전, 작압전, 만세루, 금법당, 오백라한전, 명부전, 관음전등은 원광국사가 초창 하였으나  건물은 대무문 이조중엽과 일제때 건물이다. 이 중에 대웅보전과 만세루는 이조 중엽의 건물양식으로  학술연구상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은진전은 운악화상이 창건하고 칠성각은 박선월 주지가 짓고  1977년에서 1980년 사이에 전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며 범종을 개주하여 범종루를 신축하고 설현당, 양진당,  수월문, 사리암 요사 목욕탕 정랑을 신축하고, 만세루 관음전을 중수, 경내 면모를 쇄신했다.  내원암은 설송대사가 초창하고 북대암은 신승이, 사리암은 보양국사가 초장하고 정암선사가  중창하였으며 청신암은 최현화화상이 지었다. 이 외도 저족문이 있고 배바위 학소대폭포등이 있다.                                                     * 운문사 처진소나무 *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어 매우 희귀하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9.4m, 둘레는 3.37m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3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불려진다.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1592)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해 가꾸고 있다.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 내시고택*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에는 특별한 고택이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45호로 지정된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이 그곳이다. 조선시대 내시(內侍)가 살았던 내관가(內官家)로 궁궐 주변이 아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여러 대에 걸쳐 살면서 조성된 가옥으로는 유일하다.  김씨고택은 몸채의 방향이 남향으로 할 수 있음에도 궁궐이 있는 서북향으로 지어져 있다. 안채 또한 노출을 꺼리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는 등 일반적인 반가(班家)와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사당 지붕에 새겨진 여러 장의 막새에는 ‘강희 25년 병인 윤4월’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연도(1686년)를 알 수 있지만 건물의 구조방법이나 양식으로 볼 때 1800년대에 현재와 같은 규모의 형태로 확장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가옥의 실측조사 때 별묘(別廟)에서 발견된 ‘내시촌 통정김일준가세계’에는 시조부터 15세(世)까지의 실직과 이름, 본관, 산소의 위치와 좌향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시조가 이곳에 정착한 시기(1500년대) 및 이성독자(異姓獨子)로 상속돼 이어온 내시가계의 내력을 자세히 알려준다. 가첩의 주인인 16세 김일준(金馹俊ㆍ1863~1954)은 그 벼슬이 정3품인 통정대부에 이르기도 했다.  가옥 배치는 안채와 중사랑채, 큰사랑채, 고방채, 큰고방채, 대문간채, 사당 등 7동으로 구성돼 있으며 행랑채 및 광채도 있다. 담은 높게 쌓아 외부와 차단하고 있으며 대문채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노내시가 기거하던 큰사랑채가 있고 우측에는 사당이 있다. 대문간채와 마주 보고 있는 중사랑채(양 아들이 기거)는 안채, 고방채와 더불어 ‘□’자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큰사랑채가 대문간채에서 중사랑채에 이르는 출입 동선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된 것이다. 안채로의 출입은 중사랑채 좌측 옆문으로 통해서 출입하고 차면담을 두고 있는 벽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 운문사의 문화재 *  1) 보물 제193호 - 금당 앞 석등(淸道 雲門寺 金堂 앞 石燈)   이 석등은 신라 진평왕13년(591)에 조성한 것으로 금당 옆 황금탑을 밝히기 위해 세워진 석등이다.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 형태인 팔각형을 한 석등으로 높이는 258cm다. 전체적으로 보아 각부의 균형이 잡히고 조각도 우아한 걸작품이다.  2) 제208호 - 동호(淸道 雲門寺 銅壺)   이 청동호는 임란 때 분실된 것을 운문사 우측 계곡인 약야계에서 인조10년(1632)에 발견한 것이다. 화염문 장식은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걸쳐 만들어진 부도 상륜부에서 볼 수 있는 삽자형 화염문 보주형과 비슷하다. 동호의 용도는 알 수 없고 전체의 색감은 흑색으로 감로준이라는 이른바 불구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명문에 의하면 제작 연대는 신라말 고려초로 추정된다. 3) 보물 제316호 - 원응국사비(圓鷹國師碑)   이 비는 이수와 귀부(龜趺)는 없어졌고 세 쪽으로 깨어진 비신(碑身)만 복원한 비석으로 높이 230cm, 폭 91cm 비문은 원응국사가 운문사를 중창한 업적과 그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은 고려 명장 금강거사 윤언이(1090~1149)가 지었고, 글은 신라 명필 김생에 버금간다는 대감국사 묵암 탄연(1069~1158)이 썻다. 4) 보물 제317호 -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석조여래좌상은 작압전(鵲鴨殿)에 사천왕석주(보물 318호)와 같이 모셔져 있는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육계가 뚜렷한 나발(螺髮)의 머리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5) 보물 제318호 - 석조사천왕상(石造四天王像)   사천왕석주들은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며, 또한 어떤 건축이나 조형물 등에 사용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전탑의 탑신이나 벽면에 봉안된 석주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6) 보물 제678호 - 동ㆍ서 삼층석탑(三層石塔)   대웅보전 앞에 쌍탑을 건립한 까닭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기세가 전복하기 쉬운 작은배와 같다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고려때 세웠다 전한다. 이 쌍탑의 상층기단에는 앉아 있는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추녀 밑이 수평을 이루어 경쾌하고 날씬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앙화(仰花)가 남아 이쏘 기단 일부가 새 돌로 보수되었다.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7) 보물 제835호 -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대웅보전은 정면3칸(14.7m), 측면3칸(12.8m)의 팔작지붕이며, 창호는 전면 전칸에 꽃살문 분합을 달고 어간(御間)은 넓어 5짝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꽃잎무늬가 있는 문은 한 짝만이 남아있다. 효종4년(1653)에도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8) 보물 제1613호 - 비로자나삼신불회도(毘盧遮那三身佛會圖)   운문사 삼신분회도는 1755년 처일(處一)의 주도로 총 19명의 화승이 모여 제작한 불화이다. 이 분화는 거대한 화폭에 삼신불과 여러 권속들을 함께 그린 1폭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양식이다. 특히 보살형의 노사나불이 설법인을 하지 않고 연꽃을 들고 있는데 이는 괘불화가 아닌 후불도로서는 유일한 표현이다. 안정된 화면구성과 균형잡힌 인물표현, 적색과 녹색이 대비를 이루는 차분한 색감 등에서 18세기 불화의 높은 격조를 보여준다.  9) 만세루(도 유형문화재 424호)    만세루는 단층 팔작지붕집으로 약 150평의 내부공간이 고주없이 7량으로 가구된 대형 목조건물이다. 고졸한 맛과 함께 시원한 개방감을 주고 있다.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후 여러차례 중수되었다. 건물의 용도는 원래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나 설법을 하는 장소였으나, 현재는 대중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10) 내원암석조아미타불좌상(도 유형문화재 342호)    지금은 개금불사로 금동불처럼 보이나 재질은 옥돌, 속칭 경주 일원에서 볼 수 있는 흰돌이다. 높이는 90cm, 폭 60cm이며, 강희 20년(1681)에 조상되었다. 11) 내원암 산신도(도 기념물 572호)   이 산신도는 견본채색에 세로 99.0cm, 가로 64.4cm인 자그마한 크기의 그림으로서, 화면은 산신과 동자, 호랑이가 중심 도상(圖像)을 이루고, 소나무와 바위산, 그리고 원경의 폭포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형식의 산신도이다. 그림의 전반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화면 상단의 채색이 아래 부분에 비해 많이 탁해진 상태이다. 1898년(광무2)에 내원암의 금당에 봉안 되었다.                * 운문사 승가대학 *개교: 1958년유형: 사립 승가대학교훈: 입지발원(立志發願), 정진불퇴(精進不退), 유통교해(流通敎海)  운문승가대학은 경북도 청도군 운문사에 위치한 비구니 승가대학이다. 일본 하나조노 대학[花園], 중국 칭화 대학[淸華大學]과 학술교류협정을 맺고 있으며, 학훈은 입지발원(立志發願: 원대한 뜻을 세우고 가없는 원(願)을 발(發)한다.), 정진불퇴(精進不退: 끊임없는 정진으로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유통교해(流通敎海: 부처님의 교법을 널리 전한다.운문승가대학의 편집과 출판에 관계된 제반 사항을 관할하는 문화부, 교화부가 있고, 도량 내에 자동판매기를 설치하여 수익금을 천마재활원, 상주 호암사, 대원양로원, 연꽃마을, 보리수 마을, 부산중앙신행회, 성순자 군법당 등 이웃들과 나누는 실천부서인 신화부가 있다. 1958년 개설된 운문사 전문강원이 전신으로, 1987년 승가대학으로 바뀌었다.교과과정은 사미니과(1학년), 사집과(2학년), 사교과(3학년), 대교과(4학년)로 이루어져 있다. 사미니과에서는 치문, 인도불교사, 불교학개론, 사미니율의, 염불, 사집과에서는 서장(선가귀감), 도서, 선요, 절요, 중국불교사, 우법소승, 대총상, 구사론, 사교과에서는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한국불교사, 유식강요, 대교과에서는 화엄경, 화엄학개론을 배운다. 선택과목으로는 영어, 맹자, 꽃꽂이, 피아노, 서예, 사군자, 컴퓨터, 요가 등의 과목이 있다.                     * 운문사의 4대암자 *  1) 사리암(邪離庵)   운문사 남쪽 10리 지점의 산 중턱에 있는 사리굴에 건립된 암자이다. 나반존자(那般尊者)를 봉안하는 기도처로 부산을 비롯한 각지의 신도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2) 청신암(靑神庵)   운문사 입구의 해찰교를 지나 내원암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으며, 조선조 말에 창건 되었다.  3) 내원암(內院庵)   청신암을 지나 부도밭을 거쳐 계곡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원응국사가 처음 세웠고, 석조아미타불좌상과 산신도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 북대암(北臺庵)   운문사의 북쪽 지룡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운문사가 오갑사로 창건되기 이전 신승이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지었다는 기록의 암자가 바로 북대암의 전신이라 여겨진다.                                      * 2개의 운문사 대웅전 *  대웅전 중 작은 대웅전이 처음 있었던 것이고, 큰 대웅전은 나중에 생겼다. 승가대학이 들어서면서 학인스님들이 거처, 본래 있던 대웅전이 협소해 불편하자 새로 대웅전을 짓고, 원래 있던 것을 그대로 두어 2개가 되었다고 한다. 원래 있던 문들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석조부조로 된 사천왕상은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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