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해수욕장에 가면 잊혀진 영웅들이 있다장사상륙작전,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교과서에도 실리지 못한 우리들의 영웅들···영덕군, 장사상륙작전 75주년 기념식 넋 기려학도병 이기일씨 내 나이 16살 전투 참가자신들의 이용 목적도 몰랐던 학도병들은 당시 부산에 도착한 후 머리카락과 손톱 일부를 잘라 봉투에 넣어 부대에 제출했다 마지막 소원은 전사자와 가족에 합당한 대우718명중 제대 확인되는 인원 겨우 180명뿐장사해수욕장에 가면 잊혀진 영웅들이 있다.장사상륙작전,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교과서에도 실리지 못한 영웅들의 희생정신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있다.김광열 영덕군수는 “장사상륙작전은 대한민국 오늘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자 원동력”이라고 말했다.김 군수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지켜낸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을 기리고 참전용사들의 정신과 애국혼이 후세에까지 널리 전해질 수 있도록 힘을 다해 이바지하겠다”라고 밝혔다.▣교과서에도 실리지 못한 영웅들1950년 9월 14일 새벽 5시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교란작전의 일환으로 짧은 군사훈련만 마친 학도병들이 영덕군 장사리에 상륙한다.낙동강 방어선이 위태롭던 당시, 17세 전후의 어린 학생들이 무기를 들고 포항 장사 해안에 상륙해 북한군의 배후를 교란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전투 경험은 커녕 총 쏘는 법만 겨우 배우고 전쟁터로 나온 어린 학생들은 목숨을 내걸고 6일간의 전투로 장사리 인근에 있는 북한군을 섬멸시키고 7번 국도를 봉쇄한 뒤 북한군 보급로를 차단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문산호가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양동 작전의 일환으로 알려지고 있다. 탑승한 전투대원 772명 중 700명 이상이 사망했다.이 작전에서 수많은 학도의용군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고, 생존자들 또한 긴 세월 침묵 속에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견인한 결정적인 전략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이들의 활약은 역사 교과서에도 한 줄 실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외면받아 왔다.경북교육청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역사 속에 잊혀졌던 ‘장사상륙작전’의 학도의용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교육적 가치로 되살리고자 2022년부터 매년 ‘전몰 학도의용군 추념식’을 열어오고 있다.경북교육청 학생생활과를 중심으로 학생과 교직원, 지역민이 함께하는 이 행사에서는 묵념과 헌화, 참배는 물론, 당시 작전을 재조명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병행해 그 의미를 되새긴다.이처럼 잊혀진 전쟁 영웅들을 다시 기억하고 기리는 노력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역사적 책무임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우리는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들이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희생정신을 잊지 않고,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는 필요성을 알아야 한다.▣잊혀진 영웅들을 찾아서영덕군은 1950년 9월 14일 전개된 장사상륙작전의 75주년을 맞아 지난 12일 장사해수욕장에 있는 전승기념탑에서 기념식을 가졌다.행사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수행된 장사상륙작전을 기념하고, 참전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마련됐다.기념식에는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생존 영웅들과 유가족, 지역 주요 인사, 군 장병, 주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해 호국영령을 추모했다.올해 행사엔 육군 제50보병사단 해룡여단이 전투 화기물자 전시와 개인 피복류 체험을 제공해 교육적 의미를 더했다.영덕군은 올해 7월 리뉴얼 사업을 마친 문산호를 무료 개방해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함께 이뤄졌다.기념식에 앞선 지난 11일 영덕불교사업연합회가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봉행해 전승기념을 더욱 뜻깊게 했다.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날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하고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대다수가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의 병력이 남정면 장사리에서 6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펼친 양동작전이다.참전용사들은 태풍과 수송함인 문산호가 좌초되는 악조건 속에서 적 270명을 사살하고 학살 직전의 애국청년 1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이바지했다. 이 작전으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했으며, 39명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군은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2년 전승기념공원 착공했다. 2020년 전승기념관 개관 등의 추모사업을 추진했다.올해는 전승기념관을 새로 단장해 더 큰 감동과 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이기일 경인일보(6월13일자)에 따르면 장사상륙작전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기일(92)씨는 이후 현역병으로 전환해 ‘저격능선 전투’에서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 씨와 함께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학도병들에게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인천시 옹진군지회장을 지냈던 이기일(92)씨는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학도병이다. 옹진군에서 생존해 있는 단 2명의 무공수훈자 중 1명이기도 하다.황해도 벽성 출신인 그는 1949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동생과 함께 서울에 왔다. 이듬해 6·25 전쟁이 터졌고 동생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가 경남 밀양까지 내려왔을 때 국군에서 모집 중인 학도병에 들어갔다. 나라가 위험하다는 소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시 이 전 지회장이 들어갔던 부대는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다. 대대장 이명흠 대위가 대구와 밀양에서 모은 학도병 718명(추정치)으로 부대가 구성됐다. 이 전 지회장은 “기초적인 제식훈련을 한 주도 채 안 받고 부산으로 떠났다. 학도병마다 입대 날짜가 조금씩 달랐다”며 “이후 부산으로 이동해 3~4일 더 훈련을 받고 출항했다”고 회상했다.영덕 장사리 해변에서 1950년 9월 15일 이뤄진 장사상륙작전은 같은 날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기만 작전이었다.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켜 인천상륙작전에 집중되는 북한 병력을 줄이기 위한 목표였다.▣내 나이 16살 전투 참가자신들의 이용 목적도 몰랐던 학도병들은 당시 부산에 도착한 후 머리카락과 손톱 일부를 잘라 봉투에 넣어 부대에 제출했다. 이틀 정도가 1950년 9월 13일 출동 명령이 떨어졌고, 학도병들은 다음날인 14일 오후 2시께 부산항에서 ‘문산호’(2천700t급)에 올라탔다. 출정식과 함께 학도병들에게 백설기가 1개씩 돌아갔다. 승선인원은 학도병 718명과 선원, 현역군을 포함해 모두 772명이었다. 이들에게 나흘치 식량인 미숫가루 3봉지와 수류탄 2개, 탄약 300발이 지급됐다. 총기류는 ‘카빈 소총’부터 일본식 ‘99식 소총’, 노획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련식 기관단총 등 다양했다. 그만큼 급하게 구성된 부대였다. 15~19살 소년들 구성된 학도병에게는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당시 이 전 지회장의 나이는 16살이었다. 그는 화기중대인 5중대에 속했다. 학도병은 1~5중대로 나눠졌는데 4중대는 숫자 ‘4’가 들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 전 지회장은 기억했다. 그는 “훗날 생각해보면 5중대에 지급된 박격포와 기관총도 인민군이 쓰던 것과 같았다. 아마 노획한 것을 우리에게 준 것 같다”며 “목적지도 모른 채 배가 출항했다. 누가 ‘쓰시마’(대마도)를 지난다고 해 처음에는 일본에 훈련을 받으러 간다는 소문이 배 안에서 퍼졌다”고 했다.학도병들의 기대와 달리 문산호는 포항 북쪽 25㎞ 지점인 장사리 해변으로 향했다. 북한군의 점령지였다. 당시 일본 규슈 앞바다에서 동해상으로 지나가는 태풍 ‘케지아’(Kezia)의 영향으로 기상 환경이 좋지 않았다. 배가 심하게 요동쳤고 모든 학도병이 멀미로 구토를 했다. 문산호는 출항 이튿날인 9월 15일 오전 4시께 장사리 앞바다에 도착했다. 높은 파고에 해변까지 도달하지 못했고 암초 위에 좌초됐다. ▣절반 이상 이미 상륙 과정 전사선원들이 모래사장까지 헤엄쳐 가 나무에 밧줄을 묶었다. 육지까지 이어진 밧줄을 붙잡고 두 개 중대가 먼저 상륙을 시도했다. 이 전 지회장은 “앞서 나간 중대 중 절반이 이미 상륙 과정에서 죽었다. 그걸 보고서도 뒤따라 밧줄을 타고 해변으로 갔다”고 회상했다.이 전 지회장이 속한 5중대도 뒤따라 밧줄을 잡고 해변으로 향했다. 밧줄을 타고 빠르게 내려가며 손이 다 까졌다.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뜨겁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 전 지회장은 중간에 밧줄을 놓쳐 바다에 떨어졌다. 배낭이 물에 젖으며 몸이 무거워졌다. 1~2m를 앞으로 헤엄쳐도 파도가 한번 치면 3~4m씩 뒤로 밀려났다. 배낭을 버리고서야 겨우 해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손에 쥔 소총은 모래가 들어가 작동하지 않았다. 마침 미국 해군의 구축함에서 지원 포격이 쏟아졌다. 이 전 지회장은 “해변에 도달했을 때가 아침 8시쯤이었다. 배낭은 물속에 있고 들고 있는 총도 작동이 안 돼 버렸다”며 “포격이 끝나고서 버려진 다른 총을 주워 목표인 ‘200고지’를 탈환했다”고 했다.학도병들은 200고지 점령 후 대열을 정비하고 근처 271고지까지 탈환했다. 하지만 상륙 이틀이 지난 17일부터 북한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의 추가 병력이 밀려왔다. 이들을 이끌던 이명흠 대위는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다시 장사 해변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타고 온 문산호는 이미 좌초돼 이용할 수 없었다. 19일 오전 조치원호가 학도병들을 태우러 도착했지만 해변에 접안을 못했다. ▣이씨의 마지막 소원 합당한 대우학도병들은 다시 배와 이어진 밧줄을 잡고 헤엄쳤다. 미 해군의 포격 지원이 있어 상륙보다는 퇴각이 수월했다. 하지만 학도병 전원의 승선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물 때가 바뀌기 시작했고 결국 일부를 남긴 채 배가 떠났다. 이 전 지회장은 “당시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몸만 배에 타라고 했다”며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학도병들이 ‘로프’를 잡고 배까지 얼마나 빠르게 갈 수 있겠나. 결국 40~50명 되는 인원은 승선을 하지 못하고 배가 출발했다”고 했다.이 전 지회장은 부산항으로 복귀한 다음에도 현역병으로 전환해 각종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정전협정이 체결 이듬해인 1954년 6월에서야 군에서 제대했다.이 전 지회장의 마지막 소원은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해 전사한 학도병과 그 가족들에게 합당한 대우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 전 지회장이 1970년 국방부에 요청해 받은 문서에서는 학도병 718명 중 제대가 확인되는 인원은 180명뿐이다. 나머지는 전사·실종·결번·불명 등으로 분류됐다. 이들의 명단은 남았지만 학도병 지원 당시 제출한 집주소 등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는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이 부산항을 떠나기 전 냈던 손톱과 머리카락 봉투도 사라졌다.이 전 지회장은 “자신의 가족이 학도병으로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했다는 것을 모르는 유가족이 아직도 많다”며 “학도병들은 사실상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가의 예우는 부족했다”고 했다. 해군에서 2019년 문산호 선원 11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한 것과 달리 육군은 학도병들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다. 이 전 지회장이 받은 화랑무공훈장은 장사상륙작전이 아닌, 현역병 시절 ‘저격능선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주어졌다. 이 전 지회장은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들도 이제 몇 안 남았다”며 “산 사람들은 그래도 이름이 기억되지만 전투에서 죽은 학도병들은 유골조차 찾지 못했다. 내가 죽기 전, 과거 함께 했던 학도병들이 훈장이라도 하나 받아 명예를 찾고, 그 가족들이 학도병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길 바란다”고 했다.기사제공=대구광역일보 전병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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