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낮엔 기온이 제법 올라간다. 겨우내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나무의 줄기에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된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밀려 나오는 ‘생명의 의지’다. 어떤 나무는 벌써 줄기에 연둣빛이 배어나고, 또 어떤 나무는 잎보다 먼저 꽃망울을 부풀린다. 나무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움직임도 다르다.
우리는 흔히 “봄이 왔다”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각 나무들의 시간표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매화가 찬바람에 살을 에이며 꽃을 피울 때, 참나무는 아직 깊은 잠을 자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
나무들은 잎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것, 손바닥처럼 넓적한 것, 톱니처럼 거친 것 등등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같은 나무에 달린 수백수천 개의 잎사귀들은 얼른 보면 비슷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은 잎은 하나도 없다.
햇빛을 받는 방식이 다르고, 추위를 견디는 방식이 다르고,삶을 이어가는 사정이 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결코 ‘복사판’이 없다. 개성이다. 그것은 사실 생명의 원리라 할 수 있다. ‘큰 다름’은 물론 ‘작은 다름’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창조 현상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이로운 불일치는 사람에게 더욱 확실하게 나타난다. 사람의 외부 생김새가 다른 것은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형제간이라도 각자 체질이 다르다. 그러나 진짜 차이는 보이지 않는 내면, 즉 ‘생각의 기준’과 ‘판단의 잣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내면적 품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정의가 삶의 최우선 가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화나 안정이 더 절실할 수 있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누구는 쓸모를 따지고, 누구는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이 가치관의 차이가 결국 사람의 차이가 된다.
생각의 ‘기준’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세월의 나이테이며, 그가 견뎌온 삶의 기후가 만들어낸 축적물이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나무는 뿌리를 깊고 길게 뻗는다.
추위에 견디는 나무도 있고, 더위에 강한 나무도 있듯이 사람도 그렇다. 사람은 다양성의 표본이다.
그 사람의 ‘기준’을 이해해야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삶의 과정이나 관계에서 ‘저마다의 정답들’이 부딪치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사회는 자기 정답들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크다. 내가 가진 잣대가 유일한 법칙이라고 믿는 순간, 다름은 ‘틀림’이 되고 논쟁은 ‘투쟁’이 된다. 다름은 인종 차별, 종교 전쟁, 마녀사냥 등 역사에서 많은 불행을 초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기준’의 차이에서 온 것 뿐이다.
마치 어느 나라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좌측통행을 택하고, 어느 나라는 우측통행을 택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다.
차이는 다양성이다. 나무와 숲이 아름다운 것은 각자의 다양성 때문이다. 다시 창밖의 나무를 본다.
잎을 터뜨리려 안간힘을 쓰는 저 나무는 옆 나무가 꽃망울을 먼저 낸다고 해서 따라 하지 않는다. 제안의 시계가 가리키는 때를 묵묵히 기다리며 순응할 뿐이다. 하나의 봄은 수만 개의 차이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기준’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논쟁은 이해와 공존을 위한 협력으로 승화될 것이다.
역지사지다. 잎은 잎대로, 줄기는 줄기대로, 그리고 모두는 모두의 생각대로 다른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과가 다 같을 수는 없다. 좋은 사례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택한 나라는 다양성을 존중하여 발전하게 되었고, 통제적 사회주의를 택한 나라는 다양성을 억눌러서 지체되었다. 다름의 가치를 이념화해 바꾸지 않으면, 북한과 같이 된다. 이 경우에도 그들의 ‘기준’을 정확히 읽어 낸다면, 이해를 더 할 수있고 협력의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