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은 훈민정음 반포 579돌을 맞는 한글날이었다.
한글날을 보내며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한류와 관련해서다. K-팝의 위세는 식을 줄 모르고, K-드라마·K-음식·K-뷰티·K-방산 등에 이어 심지어 진돗개까지 세계인의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K-팝 아이돌 그룹이 악령을 노래로 물리치는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 인기를 얻으면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던 전통문화도 주목받고 있다.
어쩌면 한류가 정점을 맞았다는 말은 속단일지도 모른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꾸준한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성과는 중간 결과일 뿐이라는 얘기다. 홍콩 영화나 일본 문화가 한때의 세계적 유행에 그쳤던 것과 달리, 한류는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면서 지속적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 원인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한글과 우리말을 비롯한 문화적 뿌리가 그 중심에 있음은 분명하다.
앞으로 학계가 한류와 우리 언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조명하고, 나아가 두 요소가 상승효과를 낼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길 기대한다.둘째는 고려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언해본을 9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 일이다(동아일보 5월 17일자).
지금까지 알려진 언해본은 서강대 소장본으로, 해례본의 서문과 새 문자 28자를 소개한 예의(例義)에 언문 주석을 달아 세조 5년에 발간한 것이다. 새로 공개된 언해본이 세종대왕 생존 시에 작성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고려대 측의 주장은 검증이 필요해 보이나, 서문의 첫 구절은 적지 않은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고려대본의 서문은 서강대본의 ‘나랏말싸미’가 아니라 ‘나랏말소리’로 시작된다.
이 차이는 서문의 해석 방향을 바꾸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기존 해례본의 서문은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통할 수 없어’라는 요지로 해석돼 왔다.
중국과의 소통을 문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종대왕의 관심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한자로는 통할 수 없어’라고 한 점도 수긍하기 어렵다. 두 나라는 말이 서로 달라도 한자의 뜻을 통해 소통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례본 서문은 예의와 함께 세종대왕이 친히 쓰신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 의문은 반드시 풀어야만 했다.고려대본의 ‘나랏말소리’라는 표현이 이 의문을 해결할 실마리를 준다. 이를 해석하면 ‘우리의 말소리를 한자로는 온전히 표기할 수 없어 백성들 사이에서 뜻을 제대로 펼 수 없다’는 내용이 된다.
결국 훈민정음 창제는 이두로 표기할 수 없었던 한국어의 음운을 바로잡기 위한 실질적 언어 개혁이었다는 것을 밝혀 준 셈이다. 이에 따라 ‘중국과 달아’는 ‘중국과는 달리’로 재해석해, 비교 대상이 중국과 우리의 말이 아니라 말을 표현하는 방법임을 설명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말 소리가 중국과는 달리 한자로는 표기할 수 없어...’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을 맞아 주목할 만한 세 번째 일은 ‘사단법인 선진사회만들기연대’가 한 재야 학자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세계문자 한글20’ 연구를 공식적으로 추진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글20’은 자음과 모음이 각각 10자씩인 단순한 체계이지만, 합자를 통해 훈민정음과 대등한 소리 표기 기능을 구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기록할 수 있다.
문자 체계의 간결성과 ‘10+10’이 갖는 디지털 적응성 덕분에 인공지능(AI)이나 음성데이터 기술에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새로운 문자를 제안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글의 원리를 바탕으로 인류의 소리문화를 통합적으로 연구하려는 학문적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글의 세계화가 이 연구를 계기로 새로운 활력을 얻어 뜻있는 진전을 이루게 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