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작년 말 뜻밖의 계엄 사태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현재의 상황이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정치적 혼란이나 시끄러움은 더 있었을지 몰라도 윤석열은 아직도 그대로 대통령이겠고, 이재명은 그에게 걸려 있는 각종 재판 중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마무리되면서 대통령후보 자격이 상실된 정치적 불구자로 전락했을 것이며,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입지도 지금과는 확실히 달라 예측이 어려운 상태일 것이다.따라서 논리적으로 풀이해 보면 비상계엄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이재명 대통령과 현재의 집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임 대통령이 지극히 어리석은 짓을 해준 덕분에 오늘까지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의 누구도 이런 단순한 논리는 생각하지 않은 채 당시 상황을 ‘내란’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 다방면으로 계속 이용하며 우려먹고 있음을 모두가 보고 느끼고 있다.다시 상상해서, 민주당이 대통령실과 주요 기관의 특수활동비를 전액 삭감한 2025년도 예산안을 단독으로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이 계엄 사태를 촉발한 순간적 계기의 하나라고 유추할 수도 있다. 특활비의 사용 내역이나 방법에 관계없이 예산 자체를 없애 버리면 해당 기관의 손발을 사실상 묶어 꼼짝 못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더욱이 일부도 아닌 전액 삭감은 아예 제대로 일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 야당의 끝없는 괴롭힘과 견제로 갖은 수모를 겪던 집권자의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국정은 결코 심술이나 오기로 해선 안 되는 막중한 일이다. 또 정치적 목적으로 국정 운용을 악용해서도 안 된다. 당시 예산을 전액 삭감한 표면적 이유는 있을 것이다. 숨겨둔 의도가 무엇이든 절대 다수 의석으로 국회를 이끌어 가는 야당이 자기 뜻대로 무리하게 처리했으면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같이 져야 한다. 즉, 특활비 없이도 정상적인 국가 운영은 가능하고 아무 문제도 없다는 논리에 대한 책임이다.민주당은 그러나 대통령 탄핵에 이은 선거에서 자기들이 집권하자 전액 삭감했던 특활비의 절반을 추경에서 슬그머니 부활시켰다. 실상은 올해 하반기부터 임기가 시작됐으니 전액 부활시킨 것과 다름없다. 뒤이어 내년도 예산안에는 특활비를 원래대로 완전히 부활시켜 놓았다. 그러고도 대통령실 등의 특활비를 전액 삭감했던 지난해의 만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도 없다.선의든 악의든 세상사의 모든 관계에서 중요한 것의 으뜸은 신뢰다. 어떤 이유나 명분에서 했던 간에 자기가 공적으로 한 언동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공직자나 집단의 기본 도리이므로 자기들도 해당 기관들의 특활비를 없애는 것이 당연하며, 전부가 아니라면 다만 일부라도 스스로 깎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자기들의 과거 결정에 대한 책임과 도리다. 옛말대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모습은 아니더라도 국정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주체의 당연한 자세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고, 과거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한마디 사과나 변명조차 없다. 앞에서 해본 상상과 추측이 근거 있는 가능성임을 보여 주는 현실이다.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계속되는 이런 부조리를 유권자가 질책하고 응징하지 않는 잠잠함이다. 왕조 시대나 민주화되지 않은 나라와 달리 지금은 선거라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주권자의 마음을 나타내고 심판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다. 굳이 선거가 아니라도 여론조사를 비롯해 유권자가 자신의 마음과 반응을 표시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은데도 집권 세력의 부조리에 무관심하거나 용납하는 자세를 보여선 곤란하다. 엄중한 국정을 내로남불로 농단해도 무방하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집권 세력은 앞으로도 별 부담 없이 더 노골적으로 부조리를 쏟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괜찮다고 국민 다수가 느낀다면 국운 하강의 첩경으로 접어들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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