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대상을 2028년부터 자산 10조원 이상 상장사로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기업부담을 고려해 일부 면책 조항을 둔다고 하지만 ESG 공시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규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부 여당은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산업계가 전하는 동향 분석을 보면 지금은 세계 주요국이 ESG 규제의 속도를 조절하거나 재검토하는 시점이다. 한국만 기업부담을 키우는 규제의 페달을 밟는 게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가. 법제화에 들어가기 전에 여권은 냉철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SG 공시는 단순히 보고서나 몇 장 더 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온실가스 배출량과 공급망 관리, 인권·노동, 이사회 운영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방대한 자료와 정보를 국제기준에 맞춰 수집하고 검증해야 한다. 공시라는 게 말 그대로 기업이 투자자와 소비자에게 공개적으로 내놓는 공식 자료인 까닭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기업 내 전담 조직을 만들고 내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외부 회계법인이나 전문 컨설팅 업체의 검증까지 받아야 한다. 적지 않은 인력과 비용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이런 부담이 가벼울 수 없다. 그런데 2030년까지 직접 대상기업과 종속회사를 포함하면 3000곳 이상이 된다는 전망인 만큼 중견 기업 규모로 공시 대상이 확대되면 상장사, 비상장사 할 것 없이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다. 회계법인과 로펌 등은 이 부문의 자문시장을 놓고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조원 대의 신규 자문시장을 정부가 앞서 열어주는 셈인데 법률과 회계 전문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공포와 긴장’ 기반의 까다로운 규제 신설은 언제나 이런 전문가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공간, 새 시장이 된다. 이런 일은 오랫동안 경험해온 바다.
정부는 ESG 공시 강화가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이게 되고, 이로 인해 해외 자금 유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어쩐지 책상에서 파악하고 계산하는 탁상의 기대효과일 공산이 다분해 보인다. 이에 반해 기업들이 떠안아야 할 비용과 규제 부담은 눈앞의 현실이다. 최근 몇 년간 기업들은 공급망 실사, 탄소배출 규제, 각종 공시 의무 확대 등으로 이미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다. 여기에 법을 만들어 ESG 공시까지 본격적으로 의무화하면 투자와 연구개발에 써야 할 자원을 일부라도 규제 대응에 투입해야 한다. 명분에 집착하다가 실리는 놓쳐 버리는 비효율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국제 흐름과 따로 간다는 사실도 문제다. ESG 공시를 가장 강하게 밀어붙였던 유럽도 기업 경쟁력 약화를 우려해 규제 시행 시기를 늦추거나 적용 대상을 조정하는 등 속도 조절에 나섰다고 전해진다. 트럼프 행정부의 지금 미국은 ESG 공시 논의 자체를 아예 중단했다. 정권교체 후 기후 가스 문제와 함께 눈에 띄는 일이다.
세계가 경쟁력 강화와 규제 사이에서 현실적 균형점을 찾고 있다. 그런데 한국만 규제를 앞당기는 모습은 쉽게 납득하기가 어렵다. 설령 ESG의 취지가 좋고 필요하다고 치자. ESG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경영 준칙이라고 해도 규제로 강제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수출에서의 난관, 투자 위축 등으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또 하나의 규제 부담을 얹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기업의 자율적인 준비와 국제기준의 정착정도, 주요국의 정책 변화까지 종합적으로 살피며 기업의 동의를 얻으며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실과 이상이 균형을 잃으면 기업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규제에서 앞서간다고 선진국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