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퇴진설이 나돌았지만 강한 의지로 임기를 채울 것이라던 포스코 정준양<사진> 회장이 임기를 1년 4개월 남기고 사의를 표명했다.
정 회장은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포스코는 지난 2000년 민영화 이후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최고경영자가 교체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지 1년 만이던 지난 2009년 2월 자진 사퇴한 이구택 전 회장의 뒤를 이은 정 회장 역시 중도 퇴진을 피하지 못했다.
이로써 전 정권에서 임명됐던 4대 금융지주 회장부터 재계 11위인 KT의 이석채 회장, 그리고 재계 6위인 포스코의 정 회장까지 전격 사퇴하면서 후임 인선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예고된 MB맨들의 사퇴
정준양 회장의 사의 표명으로 포스코는 유상부 전 회장과 이구택 전 회장에 이어 또다시 최고경영자(CEO)가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낙마하는 사태를 맞게 됐다.
포스코는 정준양 회장이 이영선 이사회 의장에게 회장직에 대한 사의를 전달하고 CEO(최고경영자) 후보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차기 CEO를 선임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미 예고된 수순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가운데 정 회장은 내년 3월 정기 주총까지는 회장직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은 지난 2009년 2월 포스코그룹 회장 자리에 앉은 뒤 지난해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 회장의 사퇴설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직후부터 줄곧 제기돼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정 회장과 이석채 전 KT 회장만 초대받지 못하면서 퇴진이 기정사실화 됐지만 포스코측은 아무런 결정된 바 없다며 버텨왔다.
이명박 정부의 실세 그룹이었던 이른바 ‘영포라인’(영일·포항 출신)의 지원을 받아 회장이 됐다는 의혹 탓에 교체설이 끊이지 않았고, 이구택 전 회장이 물러날 당시 포스코건설 사장이었던 정 회장은 차기 회장 1순위로 꼽혔던 윤석만 당시 포스코 사장을 제치고 회장에 올라 코드인사 논란에 휩싸였다.
정 회장은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임기를 채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췄다. 지난달 세계철강협회 회장직을 수락한 것도 사퇴하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포스코는 정 회장의 과도한 인수합병(M&A)과 해외 자원개발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됐다는 지적을 받아왔으며, 연임을 의식해 업적 쌓기를 위해 M&A에 더 집중한 것 아니겠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정 회장은 “외압은 없었다”고 밝혔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재계 인사는 거의 없다. 김만제 전 회장까지 치면 총 네 번의 임기 중 교체다. 이번에도 정부는 지분이 없는 민간기업 포스코 인사에 압력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차기 회장 10여명 거론
정 회장이 스스로 물러나면 포스코 출신이 아닌 외부인사를 차기 회장으로 선임할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포스코는 내부 제철소장 출신이 회장이 된다는 관행이 있다”며 “외부 인사들이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되자 큰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차기 회장에는 전직 고위 관료부터 현직 공공기관 사장 등 외부 출신만 10명가량이 거론되고 있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김원길 국민희망서울포럼 상임고문, 진념 전 부총리, 오영호 KOTRA 사장, 포스코 근무 경력이 있는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등이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포스코 내부에서는 김준식 사장(성장투자사업부문장)이 0순위다. 김 사장은 광양제철소장 출신으로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정 회장의 측근이라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박기홍 사장(기획재무부문장)은 외부(산업연구원) 출신이라는 게 약점이다.
계열사의 이동희 대우인터내셔널 부회장과 정동화 포스코건설 부회장, 정 회장과 회장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었던 윤석만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도 유력한 후보군이다.
이영선 포스코 이사회 의장(사외이사)은 “포스코를 가장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이상적인 사람을 뽑는 게 중요하다”며 “절차에 따라 내년 3월 주총에서 차기 회장을 선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정부, MB와 선긋기
정 회장의 사퇴 압박설이 불거진 미묘한 시기에 국세청이 포스코에 대한 세무조사에 전격 착수했다.
3년 만에 실시되는 포스코 세무조사에 대해 재계에선 1년6개월가량 임기가 남아있는 정 회장의 퇴진을 위한 압박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정기적인 세무조사"라고 일축했다. 지난 2일 여성가족부와의 업무협약식 참석했던 정 회장은 세무조사 착수 이후 별다른 외부 일정을 갖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철강업황이 악화한 상황에서 무리한 기업 인수합병(M&A) 추진으로 회사의 체력을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이 같은 일련의 세무조사 등을 살펴보면 박근혜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란 관측이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이력은 독특하다. 1975년 공채 8기로 포스코(당시 포항제철)에 입사, 27년만인 2002년 임원으로 승진했다. 2004년 전무로 승진한 정 회장은 2006년 부사장, 2007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이뤄진 조치인만큼 그 과정에서 정치적 변수가 작용했다는 의혹이 정 회장에게는 항상 짐이었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정 회장은 강력한 경영목표 하에 실적으로 증명, 정치권으로부터 영구 독립할 수 있는 계기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정 회장이 취임과 동시에 신성장동력을 강조하면서 비철강 업체에 대한 과감한 M&A에 나선 것이 오히려 화가됐다.
포스코는 2009년 이후 3년간 지분투자 및 M&A에 총 5조원가량을 쏟아부으며, 계열사 수는 2009년 36개에서 2010년 48개, 2011년 61개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70여개에 달하기도 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이어진 철강업황 악화로 회사의 곳간이 비어가는 상황에서 무리한 M&A로 포스코의 재무구조는 급격히 악화됐고, 2009년 4조원에 못미쳤던 순차입금이 2011년 20조원, 2012년 18조5000억원으로 급증했다. 60%에 못미쳤던 부채비율도 90%를 넘어섰다.
국제 신평사들은 채권 발행 등 부채성 자금 조달을 줄이고 대신 비(非)부채성 자금을 조달해 자본을 확충, 재무구조 개선을 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경고했다. 이에 포스코는 시나리오 경영 전략을 4단계인 ‘S4’로 격장시키는 등 부채 줄이기에 노력했지만 만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난 6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정 회장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국빈만찬 초청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또 지난달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10대그룹 총수 간담회에도 정 회장이 참석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