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신지리 ‘선암서원 고택체험’ 삼족당 김대유선생 소요당 박하담선생 추모하던 곳  임진란 왜군 무찌른 선조들의 함성 들리는 듯  삼신리 상설소싸움장 스타디움의 싸움소들의 거친 숨소리를 뒤로하고, 청도를 동서로 가르는 곰티재 터널을 지나 금천을 향한다. 구불구불 국도를 따라 매전을 지나 또 하나의 재를 넘어 동창에 이른다. 곧장 가면 청도의 동쪽 끝인 운문으로 향하는데, 우편으로 방향을 바꾸어 멀지않은 곳에 오백년의 향기가 온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곳, 금천면 신지리가 나타난다.  동창천이 굽이쳐 흐르는 다리를 넘어 신지리에 들어서면 마을 초입부터 위풍당당한 전통가옥들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이나 경주의 민속마을처럼 조직화되지 않았기에 더욱 고즈넉한 향기를 내뿜는 진정한 전통마을이랄까. 마을 중간쯤에 목적지인 ‘선암서원(금천면 신지리 335)’을 알리는 팻말이 보인다. 그 입구에서 좁은 마을길을 따라 몇 백 미터 들어가 마을 끝에 가서야 비로소 전통한옥 특유의 단아함 속에 황소보다도 더욱 굳센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기상을 간직한 곳, 선암서원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청도군과 박씨문중의 협약으로 시작된 전통고택 숙박체험 프로그램이 오년을 지나면서 이미 방송과 신문에 어느 정도 소개된 선암서원에는 시작 때부터 줄곧 그 곳을 지켜온 박향숙씨가 방문객들을 반가이 마중한다. “시골의 강변 겨울 바람이 차지요. 소소한 일상과 계절의 변화를 코 앞에서 느끼며 역사의 향기를 맘껏 향유하는 고택체험이 정말 즐겁답니다.”고 말하는 박향숙씨는 오늘도 서원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느라 분주하지만 지칠 줄 모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79호인 선암서원은 언뜻 보기에는 모를 훼나무가 대문 오른편에 지키고 있어 예리한 식자들만 이곳이 예전엔 서당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문 안에는 정침인 안채, 득월정인 사랑채 그리고 행랑채가 앞마당을 감싸고 있다. 건물 사이를 지나 뒷마당에 들어서면 서당이었던 소요당과 뒤편의 장판각이 나온다. 그 장판각은 보물로 지정된 ‘배가예부운략판목’과 ‘소학판목’ 등의 출처이다.  한국학의 보고라 일컬어지는 그 귀중한 판목들은 수년전 도난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도난 2년 후 트럭을 몰고 왔던 문화재절도범들이 일본으로 빼돌리기 직전에 극적으로 검거되어 전량 되찾았으나, 그로인해 그 보물들은 2005년에 안동국학진흥원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최근 개관한 이서면 소재 청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견본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을 전혀 대체해두지도 않은 채 판목들만 옮겨가니 소요당과 장판각의 허전함은 여전할 따름이다.  서당 뒷문을 나서면 선암을 굽이쳐 흐르는 동창천이 아름드리 소나무들 사이에 비경을 드러낸다. 오솔길을 따라 머지않은 곳에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비석들. 바로 임진왜란에서 승전하여 나라를 지켜낸 의사들을 추모하는 기념비이다. 서기1592년 선조25년 임진년에 왜군이 침략해 부산(음 4월14일), 밀양(음 4월17일)이 무너지고 음력 4월20일에 청도읍성도 맥없이 빼앗겼다. 이에 비분강개한 박경신장군과 박경전장군 등은 불과 사흘 뒤인 음력 4월23일에 이곳 선암서원(당시 선암사)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서로 손을 잡고 의병을 일으켜 위로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열선조가 지켜온 충효로운 가문의 전통을 저버리지 않기로 맹세하였으니 어찌 자네들의 거사에 영광이 없으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동래부사 송상현공의 장렬한 죽음을 본받아 그같이 당당하게 싸워주기를 바라며 눈물로써 당부한다.” 삼우정 박경신장군은 의병에 참여한 두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사회지도층들이 앞 다퉈 멀쩡한 자녀들의 군역면제를 획책하는 오늘날 참으로 그 교훈이 남다르다하겠다.  이어 청도의 의병들은 여러 차례의 패주와 희생을 겪었다. 하지만 경산 자인의 최문병 의병장과 연합 작전을 펼치고, 최정산으로 피난했던 당시 청도군수 배응경까지 합세시켜 총공세를 펼쳐 왜군을 격퇴하고 음력 7월9일 불과 두 달 여 만에 청도읍성을 탈환하였다. 그때 시작된 ‘청도읍성밟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선암서원은 원래 유학자로서 청도의 큰 스승이었던 삼족당 김대유선생과 소요당 박하담선생을 추모하던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고종 때 박하담선생의 후손들이 중건하여 선암서당으로 바뀌었고, 그 후 선암서원으로 경상북도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게다가 인근의 운강고택과 만화정, 운남고택, 명중고택, 임당리 김씨고택, 도일고택은 물론 청도팔경 중의 하나인 삼족대, 운문사 운문계곡 운문호, 운곡정사, 민병도갤러리, 영담한지미술관 등이 이서국 창건 이래 이천년의 숱한 스토리들을 간직한 채 머지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빼어난 산수 속에 잘 보존되고 다듬어진 유적만이 다가 아닐 것이다. 그 속에 온갖 역경과 희생을 이겨낸 선현들의 함성과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 값진 판목과 의미 있는 비석을 새겨서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이야기를 전하며 정금보다 귀한 교훈으로 글로벌 리더들을 키워내는 바로 그 곳, ‘선암서원 고택체험’에서만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매우 값진 혜택이 아닐까한다.    둘째,  박경신장군의 숨결 임당리‘임호서원’ 임진년 4월23일 전국 최초 의병 창의 청도조전장 밀양부사로 왜군 크게 무찔러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장군 같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구해낸 위대한 영웅들이 대한민국 오천년 역사에는 많이 있다. 게다가 임진왜란 같은 절체절명의 국난을 극복하고자 의병과 승병을 일으킨 창녕의 곽재우장군과 밀양의 사명대사 같은 분도 적지 않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청도지역에도 위와 같은 영웅들 못지않게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을 창의하고, 왜군을 크게 무찔러 청도 땅과 청도의 백성들은 물론 밀양까지 지켜낸 분이 있었다.  삼형제간의 우애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 `삼우정(三友亭)‘이라 불리기를 바라셨던 박경신(朴慶新)장군은 1539년 9월9일(이하 음력)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 가족을 따라 금천면 신지리(섶마루)로 이거했다. 그곳에서 친조부인 소요당 박하담선생과 삼족당 김대유선생, 경재 곽순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1569년(31세) 무과초시 급제, 이듬해 무과복시 급제, 1573년 무과전시에서 장원급제하여 적순부위 훈련원참군에 임명됐다. 1589년 건공장군 훈련원부정에 승진했다. 1591년(53세) 5월 더 이상의 벼슬길을 마다하고 휴가를 얻어 섶마루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국 최초 의병창의, 청도읍성 탈환  이듬해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의 진격로였던 밀양과 청도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청도읍성이 빼앗긴 지 불과 사흘 뒤인 4월23일 박경신장군은 선암사(현 선암서원)에서 사촌동생인 박경전장군 박경윤장군 등과 지남 철남 두 아들을 비롯해 박씨문중 장정 십여명을 불러 모아 맹약문을 읽으며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했다.  같은 날 저녘 박경신장군은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러 혼자서 말을 몰아 서울로 향했다. 당시 도승지였던 이항복선생과 임금을 만난 장군은 선조의 피난길을 호위해 평양까지 갔다. 5월7일 청도조전장의 명을 받아 단기필마로 평양을 떠난 장군은 온 나라 길목마다 가득 찬 왜군과 싸우기도 하고 피하기도하면서 7월1일 가까스로 청도에 돌아왔다. 그때까지 청도의 의병들은 전략과 전술은 물론 병기와 병력이 주둔 중인 왜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죽을 고생을 겪으며 버텨오고 있었다.  박경신장군은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경산 자인의 최문병의병장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대구 최정산에 숨어있던 당시 청도군수 배응경을 합세시켰다. 7월5일 청도관내 동서면의 장정들을 격문을 보내 의병으로 모았다. 7월9일 새벽이 지나면서 “너희들은 모두 용감한 사람들이다. 적과 맞닥뜨려 먼저 물러서서는 안된다. 오로지 있는 힘을 다하여 왜적을 무찔러라.”고 명령을 내린 박경신장군은 활을 메고 앞장서서 말을 달렸다. 청도와 자인의 칠팔백의 모든 의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여러 왜군이 성을 뛰쳐나와 칼날을 번득였다. 장군의 활시위가 당겨졌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맨 앞의 왜장 가슴 한복판에 박히면서 거꾸러뜨렸다. 아군 진영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 여러 장사들이 다투어 돌격했다. 드디어 아군은 모두 청도 읍성에 들어갔다.  혁혁한 전공, 밀양부사 겸직  청도의 의병들이 청도읍성을 두 달 여 만에 탈환하였으나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은 그제 시작에 불과했다. 특히 밀양과 청도지역은 왜군의 진격로이자 보급로로써 피해가 막심했다. 청도읍성 탈환 후 일부 의병장들의 충정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경신장군은 도피했던 배응경군수에게 모든 지휘권을 넘기고 오로지 청도조전장의 책무에 충실했다. 온갖 희생과 역경을 겪었으나 그에게는 결코 굴함이 없었다. 그의 지략과 용맹함은 왜군들에게는 두려움의 화신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천지신명의 보살핌과도 같았다. 임진년과 그 이듬해 청도의 사계절은 전투에서 시작해서 전투로 끝이 났다. 그 선봉에는 오십대를 훌쩍 넘긴 장년의 장수 박경신장군이 장검을 어깨에 메고 활시위를 단단히 메워 당기며 전광석화 같이 말을 달렸다. 그날 의병창의의 붉은 피를 나눠 마신 십 여 명의 의사들은 물론 뒤이어 합세한 청도의 모든 의병들이 곳곳에서 사력을 다했다.  1593년 4월1일 조정에서는 박경신장군의 공적을 높이 인정하여 밀양도호부사직을 겸직하게 했다. 부사 겸직은 박경신장군의 전장이 확대되어 경주성 전투를 비롯해 경상도 병사 박진, 창녕의병장 곽재우, 방어사 김응서 등과 협의하고 협력해 밀양과 청도의 방어에 온 힘을 기울여 왜적을 몰아냈다. 이에 좌상 윤두수 등이 조정에 보고해 1593년 윤 11월20일에 가선대부의 교지를 내렸다.  1594년 5월25일 박경신장군은 양자 같이 키웠던 두암 이기옥참봉(삼우정박경신선생실기 원저자)에게 창의와 관련된 일지와 시, 서 등 문서의 정리를 당부하고, 6월5일 밀양부 관사에서 두 아들과 이기옥참봉이 받드는 가운데 순국했다. 1605년 선조38년 박경신장군은 선무원종공신1등에 녹훈되고 녹권이 하사됐다. 두 아들도 공신2등에 각각 녹훈됐다. 후일 병조참판에 증직됐다.  임호서원 경의사에 배향, 4종17점 보물 남겨  1996년 1월 19일 국가 보물(1237호)로 지정돼 대구박물관에 보관 중인 유물은 삼우정 박경신(三友亭 朴慶新)장군과 그의 두 아들인 지남(智男)·철남(哲男)에게 내린 포상 문서인 선무원종공신록훈인증서(宣武原從功臣錄勳認證書) 13매와 박경신장군에게 내사된 선무원종공신록권 1책, 순조년간 박경신 부부에게 증직(贈職)된 교지(敎旨) 2매, 선조12년(1579년) 장군의 무과전시장원(武科殿試壯元)을 축하하기 위해 모친 장씨가 급여(給與)한 별급문기(別給文記) 1매 이다.  임호서원을 운영하는 경의계에서 발간한 ‘삼우정박경신선생실기’는 성균관 학자들의 도움으로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창의일록이 포함된 그 책에는 박경신장군의 임진란 백전백승의 전공이 적혀있다. 또 박경신장군의 빽빽한 숲과 같은 학식과 그윽한 호수 같은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시와 서 등 여러 작품들도 소담스레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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